신곡 ‘We Appreciate Power’의 미래주의 - 선동 메시지
캐나다 출신 가수 그라임스(Grimes)는 독특한 개성과 철학으로 사랑받는 ‘아티스트들의 아티스트’다. 우리에게는 케이팝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그중에서도 투애니원, 에프엑스, 소녀시대의 음악을 좋아하는, 지드래곤의 열렬한 팬으로 이름을 알렸다. 올해 5월에는 케이팝 걸그룹 이달의 소녀 yyxy의 노래 ‘Love4eva’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라임스의 진가는 케이팝 팬 그 이상이다. 지금까지 발매한 네 장의 정규 앨범으로 평단의 일치된 호평을 획득했으며, 특히 2015년 최근작 <Art Angels>는 영국을 대표하는 음악 잡지 NME가 선정한 ‘2015 올해의 앨범’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과감한 비디오 아트와 패션, 콘셉트를 한데 아우르는 뮤지션인 셈인데, 심지어 그의 애인조차 평범하지가 않다. 올 5월 멧 갈라(Met Gala) 패션쇼에서 공개한 그의 남자 친구는 민간 우주 사업, 인공지능, 전기 자동차 등 혁신을 이끄는 억만장자 엘론 머스크(Elon Musk)다.
미래를 설계하는 천재 기업가의 애인에게 진부함은 전혀 용서할 수 없는 배덕이다. 3년의 공백을 깨고 공개한 신곡 ‘We Appreciate Power’는 발매 동시에 피치포크, 빌보드, 롤링 스톤 등 유수의 음악 잡지부터 하입비스트(Hypebeast) 같은 패션지까지 문화 예술계 전체의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다. 단순히 새 노래를 발표해서가 아니다. 이 노래가 강한 논조로 선동하는, 미래 인공지능(AI) 사회를 찬양하는 급진적인 메시지가 너무도 새로운 덕이다.
그라임스가 말하는 ‘힘(Power)’은 과학 기술, 그중에서도 특히 인공 지능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의 힘이다. 이미 우리는 2년 전 구글 딥마인드의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 9단을 물리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 바 있다.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학습 효과를 지닌 인공지능은 일견 먼 훗날 기술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우리의 생활 곳곳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은 금융시장, 자본 시장 및 산업 현장에는 이미 익숙하다. 몇 년 전부터 로이터와 AP통신, 가디언 등 다수 언론사들 역시 AI를 활용해 기사를 작성해왔고, 한국에서도 연합뉴스가 스포츠 방면에서 ‘AI기자’의 기사를 적극 싣고 있다. 포털 검색 알고리즘, 패션 디자인 등의 분야에도 인공지능의 힘이 중요해진다.
예술도 예외가 아니다. 2016년 인공지능은 최초의 영화 <선스프링>의 대본을 써냈으며, 이윽고 장편 공포 영화 <믿을 수 없는 것들>을 기획했다. 지난달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프랑스 과학자들이 개발한 인공지능 ‘오비어스’가 그린 그림이 43만 2천 불 (약 5억 원)에 낙찰되었는데, 유명 팝아트 미술가 앤디 워홀의 작품이 7만 5천 불에 낙찰된 것과 대비를 이뤘다.
음악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미 2016년 구글과 소니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작곡 시스템을 공개한 바 있다. 조잡한 전자음을 모아놓은 수준의 초창기 작품이 무색할만큼, 인공지능이 작곡한 노래는 이미 웬만한 인간의 수준을 따라잡은지 오래다. 한국도 이미 2017년 11월 한국콘텐츠진흥원 인재캠퍼스에서 AI와 뮤지션들의 10주 협업 과정 결과를 발표한 바 있으며, 올해 2월에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협업 작곡 체제를 선언한 레이블 AIM이 설립됐다. 딥 러닝 기술의 발전이 불러온, 인간과 기계의 공존 세계다.
‘We appreciate power’는 이와 같은 인공지능의 사회를 꿰뚫고 있다. 거칠고 왜곡된 기타 소리로 출발하는 곡은 1970년대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 시작된 인더스트리얼 (Industrial : 산업, 공업) 스타일이 록과 결합한 1990년대의 ‘인더스트리얼 록’ 스타일을 취한다. 얼마 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로 내한한 나인 인치 네일스가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그 거친 소리 위에서 가녀린 목소리로 질주하는 그라임스와 참여 가수 하나(HANA)는 현대 문명의 속도를 찬양하고, 인공지능과 로봇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 질서를 숭배한다. ‘다들 우리를 미쳤다고 하지 / 하지만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면 / 우리 모두 보상받으리’라 읊조리는 보컬과 함께, <공각기동대>가 대표적인 일본 사이버펑크와 다국적 언어를 어지럽게 교차하는 뮤직비디오로 본인이 상상하는 미래 사회를 그려나간다.
흥미로운 점은 그라임스가 곡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걸그룹 모란봉악단을 참고했다고 밝힌 사실이다. 우리에겐 현송월 단장으로 유명한 모란봉악단은 여성 연주인들과 보컬로만 구성된 밴드로, 2012년 공개 당시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를 연상케 하는 제복 스타일과 신디사이저, 전자 바이올린. 일렉 기타 등 전자 악기의 다수 사용으로 기성 북한 음악과 다른 현대적 스타일을 선보인다.
그라임스가 모란봉악단에서 본 것은 ‘AI에 대한 호의 확산의 목적으로 춤, 노래, 섹슈얼리티와 패션을 활용하는, AI 걸그룹 프로파간다 기계’의 모습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기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이들의 곡 주제 역시 지식과 과학 기술 발전을 통한 체재의 우월성 보장이다. 그라임스는 봉건 사회주의 국가의 프로파간다조차 그 수단으로 미래 사회와 과학을 다루고 있는 아이러니를 포착해낸 것이다.
사실 이 급진적인 AI 시대의 선동은 이미 20세기 이탈리아 미래주의 학파에 의해 그 밑그림이 그려졌다. 산업 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계 문명에 경도된 이들은 고전 예술의 미학을 거부하고 공격했으며, 폭력과 파괴를 찬미했다. 미래파의 사상가 마리네티의 <미래주의의 기초와 미래주의 선언>은 새로움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 나가는 이들의 격렬한 투쟁이었다.
‘속도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졌다’는 문구 아래, 그들은 기계가 가져올 미래상을 적극 찬양했다. 비록 이 사상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파시즘과 연결되기도 했고 전쟁의 폐허를 목격한 이들에 의해 도태되었지만, 기계가 인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다양한 문화 예술 사조에 밑거름을 제공했다.
파괴와 분출, 속도와 공격, 투쟁과 분노. ‘We appreciate power’의 그라임스는 21세기의 미래파를 꿈꾼다. 언뜻 곡 전체가 엘론 머스크에 헌정하는 찬미가로 읽히기도 하지만, 좋든 싫든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고 보다 정교한 모델의 출현을 앞두고 있는 우리 사회에 꽤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녀린 뮤지션이 그린 과격한 청사진이 우리 시대 어떤 대답으로 돌아오게 될지, 흥미로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