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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Jan 03. 2019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
문화는 전유 된다

아케이드 게임이 디지털 세대에 건네는 인사, 디즈니의 위엄


악당 캐릭터를 물리치고 아케이드 게임기 세상의 평화를 지킨 ‘다 고쳐 펠릭스’의 주먹왕 랄프와 ‘슈가 러쉬’의 바넬로피. 이후 6년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온 그들에겐 은근한 불만이 있다. 레이싱 게임에서 언제나 1등을 차지하는 바넬로피는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랄프는 바넬로피와의 평온한 삶을 잃어버릴까 노심초사다. 그러던 어느 날, 낡은 오락실에 와이파이 공유기가 들어오고 인터넷 선이 깔린다. 이제 이 둘은 ‘해가 뜨고 지지 않아 언제나 깨어있는’ 인터넷 세상으로 모험을 떠난다.

고전 게임 세대의 추억을 소환하며 뭉클한 감동을 안긴 <주먹왕 랄프>의 후속편은 2010년대 광활한 인터넷 시대로 무대를 옮긴다. 팩맨, 스트리트 파이터 등 추억의 게임 캐릭터를 스크린에 재소환한 전작에 비해 게임의 비중이 꽤 많이 줄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복고의 감동을 기대한 팬들이 일견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대신 <주먹왕 랄프 2>는 아케이드 게임기 속과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인터넷 세계를 환상적으로 구축한다. 극 중 바넬로피의 대사대로 ‘0과 1로 이루어진 집합체들’의 세상일 뿐인데, 그 상상을 어쩜 이토록 구체적으로 재치있게 상상해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파란 새들이 지저귀는 모습을 그대로 형상화한 트위터, 거대한 박물관 같은 인스타그램, 무수한 택배 박스들의 집합체 이베이, 인격을 부여한 검색 엔진의 자동 완성 시스템까지. 익숙해서 더 놀라운 묘사의 연속이다. 극 중 짤막하게 등장하는 네이버와 카카오톡을 찾아보시길.


랄프와 바넬로피가 ‘슈가 러쉬’ 게임기 부품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버는 과정도 지극히 2010년대 스타일이다. 2000년대 ‘비디오 게임 하면서 돈 버는 방법’ 스팸에 혹해 푼돈을 모으려던 주인공들은 이윽고 유명 동영상 플랫폼에서 얻는 ‘좋아요’가 일확천금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1980년대 추억의 캐릭터 랄프가 유명 바이럴(Viral) 동영상의 주인공이 되어 폭발적인 ‘좋아요’를 획득하는 장면은 2010년대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그 과정에서 악성 댓글을 보고 낙담하는 랄프에게 ‘인터넷 사용 1조, 절대 댓글은 읽지 않는다’라 조언하는 장면조차 현실을 정확히 반영했다.


이 세계의 대중문화를 책임지는 존재는 온전히 디즈니다. 그런데 그 스케일이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다.’. 바넬로피가 찾아간 디즈니 사이트에는 마블 코믹스의 영웅들, 스타워즈의 군인들과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토이 스토리> 등 대중문화를 장악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백설공주> 속 난쟁이가 <주토피아>의 여우 닉과 행사를 준비하는 장면은 오직 디즈니만이 실현 가능한 장면이다. 월트 디즈니 창립 95주년 기념작답다.


디즈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디즈니 프린세스 들도 총출동이다. <백설공주>, <신데렐라>와 같은 고전 캐릭터들부터 <뮬란>과 <인어공주>, 최근의 <라푼젤>, <겨울왕국>과 <모아나>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디즈니 공주님들이 바넬로피를 새 공주로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디즈니 프린세스의 조건 - ‘부모님을 잃고, 덩치 큰 남자와 사랑에 빠지며, 신비한 능력이 있다’ - 을 줄줄이 읊고, ‘슬플 때 물을 바라보면 노래가 나온다’는 클리셰를 비트는 등 재치있는 비틀기를 보여주는 것도 인상적이다.


이처럼 <주먹왕 랄프2>는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영화지만 그 방법은 전작과 차이를 보인다. 시대 흐름에 밀려 사라질 운명을 거부한 악당의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 전작의 과제였다면, 후자는 좋았던 그 시절에 머무르고자 하는 랄프가 최첨단 레이싱 게임 ‘슬로터 레이싱’ 세계에 푹 빠진 바넬로피의 발목을 잡는다. 본인의 게임을 잃어버린 바넬로피를 위해 인터넷 세상으로 들어온 랄프는 새로운 게임 세계를 ‘해로운’ 것으로 여기지만, 정작 그 바쁜 세상에서 친구를 잃을까 잘못된 결정을 연거푸 반복하는 주인공 역시 랄프다.



영화는 최근 디즈니가 강조하는 덕목 ‘아름다운 이별’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과거의 존재는 과거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시대는 현재의 시대 속에서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그 둘의 공존 과정에서 새로운 재미와 흥미가 생겨나고, 이 과정을 반복하며 대중문화는 전유 된다.

<주먹왕 랄프2>는 레트로와 새로운 것이 정신없이 뒤섞여있는 오늘날의 인터넷 세계를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여유로운 아케이드 세계와 규격화된 고속 온라인의 일상 모두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이를 어떤 형태로 소비하고 적용하더라도 대중문화의 꿈과 희망은 정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염원이다. 그 으뜸에 서 있는 거대 미디어 제국 디즈니와 네트워크 커뮤니티를 마냥 선한 역으로 묘사한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세대의 건강한 공존을 추구하는 모습은 대립과 갈등보단 훨씬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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