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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Jun 07. 2019

이동진, 최광희, 기생충, 그리고 평론.

누가 평론 래빗을 모함했나.


두 명의 ‘평론가’가
<기생충>에 각자의 담론을 더했다.
그리고 각각의 문장은
영화와 별개의 논쟁을 불렀다.
공통적으로 지적받는 부분은 ‘평론의 오만’이다.
그러나 그 오만함의 포인트는 사뭇 다르다.


명징 사태라, 대단한 작명 센스다.


먼저 이동진의 한줄평이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명징’과 ‘직조’가 일반인이 알기 힘든 단어이며, 쉬운 단어로 대체할 수 있는데 굳이 저렇게 어려운 한자를 사용해야 하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평론은 평론인가.

쉽게 말해 ‘어려운 척하지 마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반지성주의’이고 ‘무지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한국에서 평론의 영역은 딱 그 정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공한’ 평론가는 펜 대신 마이크를 잡고, 키보드 앞 대신 카메라 앞에 앉는다. 사실 그것은 전세계 모든 평론가들의 생계 유지 방법이기에 비판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상실되는 비평에 대해선 심각할 필요가 있다. 가치 판단은 선택의 길잡이 정도로만 쓸모 있다. 대중적 평론은 상업 애플리케이션의 한줄평 정도면 충분하다. 긴 글은 소수의 후원을 통해서만 지면에 실릴 수 있다. (그나마도 힙스터 서점의 책꽂이를 자랑할 뿐이지만.)

공교롭게도 이동진은 이런 평론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평론가’다. 그는 21세기 한국 대중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평론가다. 왓챠 앱에서 이동진의 한줄평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계시처럼 수백, 수천의 ‘추천’이 달린다. CGV ‘라이브톡’이 전국 영화관에 생중계되고, 특히 예술 영화의 경우 이동진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티켓팅 전쟁’이 벌어진다.

그는 평론에서 권위와 규범을 제거하며 반석에 올랐다. 이동진은 정성일처럼 영화를 해석하는 고유의 스타일을 확립하지도 못했고, <캐롤>과 <변호인>의 발언으로 논란이 일 때 중도주의와 상대주의를 언급하며 불길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널리즘의 시각이 묻어나는 절제(?)의 언어를 통해 그는 영화광이 되고픈 대중의 지적 허영을 친절하게 채워왔다. 그런 인물이 ‘명징’과 ‘직조’ 같은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서 20자 평을 작성했다. 배신감이 들 수 있다.



이런 이동진을 ‘CJ cgv의 전속 평론가’라 비판하는 평론가가 있으니 바로 최광희다. 그의 이동진 비판은 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는 <기생충>이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날 수상 소식을 보도하는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칸 영화제의 권위를 묻는 앵커에게 최광희는 지난해 황금종려상 수상작을 물었고,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한국에서의 칸은 그 정도 권위의 시상식’이라 결론지었다.

<기생충> 개봉을 앞두고 최광희는 페이스북을 통해 불편한 심기를 여럿 내비쳤다. 상업 영화에만 관심을 두던 대중과 언론이 해외 영화제 수상 소식에, 그것도 대기업의 후원으로 빚어진 영화에 ‘봉비 어천가’를 노래하는 것이 불쾌했다. 이미 음악계에 만연했을 뿐 아니라 일상화된 ‘방비어천가’를 생각해보면 그의 분노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광희는 이동진보다 더욱 ‘평론의 오만’을 행하고 있다. 나는 최광희가 어떤 유의미한 비평을 작성하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거나, 인상적인 리뷰를 작성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역시 방송 출연과 팟캐스트 등 일종의 GV, 상업 광고를 촬영한다.


심지어 그 과정에 여러 가지 논란도 따라붙었다. 2013년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여배우에게 ‘육덕진 노출 연기’를 질문한다거나, 영화 <뺑반>에 대해선 ‘가녀린 공효진에게 어울리지 않는 형사 연기’를 늘어놓았다. 동시에 자신을 ‘천재’ 혹은 ‘삐딱한 저항가’라 칭하는 건 덤이다.

최광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비자 가이드’에 불과한 20자 평에 어려운 한자 단어를 쓴 이동진은 허세로 가득한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성남 행복 아카데미> 중 본인의 강연 ‘영화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런 강연을 들으러 오는 시민이라면 이미 남다르다는 증거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재미 추구형, 오락 추구형이다...’ 누가 대중에 봉사하고, 누가 대중을 무시하는지 혼란스럽다.

요컨대 그에게선 실종된 평론의 권위를 독한 식으로라도 되찾겠다는 일종의 사명 의식이 보인다. 최광희의 주된 소통 공간은 영화 비평의 현장이 아니라 페이스북 타임라인, 지상파 방송국과 팟캐스트 채널이다. 게으른 저널리즘을 공격하는 그는 부지런한 평론가인가. 허문영이 정성일을 평하기를 ‘매 순간 모든 영화에 대해서 평론가의 자의식으로 대결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 했다. 최광희는 누구와 대결하고 있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평론가가 아닐까 싶소만.


흥미로운 점은 이동진에게 교만을 논하는 이들이 최광희에게는 무던하다는 것이다. 오만한 한줄평은 비판하면서 왜 대중의 급을 나누는 평론가에게는 관대한 걸까? 역설적이게도 최광희가 이동진을 공격하기 위해 가져온 스노비즘으로 설명이 된다. <기생충>에 쏟아지는 찬사가 불편한 사람들, 새로운 의견을 통해 타인과 나와의 구별점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칸의 권위를 감히 허물어버린 평론가의 말은 또 다른 ‘계시’와 같다.

서두의 말을 다시 써 보자. 두 명의 ‘평론가’가 <기생충>에 각자의 담론을 더했다. 그러나 이제는 ‘평론가’라는 직함에서 예전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 명은 큐레이터, 한 명은 독설가에 가깝다. 이 둘을 오만하다고 할 순 없다. 그들은 생업으로의 비평을 성실히 이어나가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사회가 부여한 비평가의 권위를 활용한다. ‘기레기’들을 비판하면서, 20자 평을 작성하고 GV를 주도하며 해설하면서. 그렇게 작품보다 담론이 앞서나간다.

평론의 이름을 달고 글을 쓰는 입장으로서 <기생충>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상황은 내게 더욱 무기력한 감정을 들게 한다. 이제 ‘쓰는’ 행위는 방송에 출연해 ‘해설’을 하기 위한 준비 운동 정도로만 여겨진다. 누구나 마음속 치열함을 품고 있다고 좋게 말은 한다. 그러나 애정으로의 비판, 심도 있는 해석을 위한 표현조차도 민감한 상황에서 투쟁과 탐구는 굶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문제의식에는 힘든 길이라는 훈계가 이어진다.

나는 대중이 우매하다거나 반지성적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생계를 위해 평론의 직함을 소비하는 평론가들도 탓해봐야 큰 의미는 없다. 단지 허물어진 평론의 잔해 위에서 담론을 오만하게 끌고 가거나, 담론을 가진 자를 어리석다 비웃는 풍토가 평론가들 사이서 지배적인 것 같아 우울할 뿐이다.


평론가들이 스스로 ‘평론은 죽었다’라 말하는 사회다. 평론을 죽인 범인은 평론가들이다. 평론의 살해된 주검에서 가죽을 벗겨낸 후 이를 둘러 쓰고 평론가라 행세하는, 평론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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