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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Sep 30. 2019

라나 델 레이의 황망한 아메리칸드림

1920년대와 1960년대의 렌즈로 바라본 트럼프의 미국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나라가 아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슬로건으로 내건 대통령이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고, 자국 우선주의와 폐쇄주의에 입각해 무역 전쟁을 벌이고, 인종 차별을 부추기며 자유와 아량의 국가 정신을 급속히 해체하는 중이다.

라나 델 레이는 작금의 미국에 '아메리칸드림'의 첫 위기였던 1920년대, 베트남 전쟁과 히피들의 1960년대 렌즈를 투영해본다. 세계 대전 후 자본의 풍요 앞에 쾌락 지상주의가 도래한 상실의 시대, 최초의 패전 앞에 기성의 질서가 해체되던 시대는 부동산 재벌을 국가 지도자로 선출한 이 시대 욕망과 꼭 닮았다. 우아하고도 음울하며, 황홀하고도 섬세한 팝을 노래하는 아티스트는 앨범 대신 '동시대의 기록'을 원한다.



아메리카니즘의 상징적인 잡지 <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 표지로 1920년대 미국인의 삶을 기록한 화가 노먼 록웰은 그래서 'Norman Fucking Rockwell'로 새로이 명명되어야 한다. 그가 충실하게 구현한 미국의 일상이란 대공황의 단초와 방종을 눈치채지 못한, 시대의 안이함이자 물질적 부유함에 눈을 가린 기록이었다. 동명의 오프닝 발라드에서 라나 델 레이는 앨범의 모순된 테마를 분명히 하는데, 풍성한 챔버 팝으로 '거의 사랑한다고 말할 뻔했던' 쾌락을 노래하면서도 곡을 마무리짓는 것은 '넌 그저 남자아이일 뿐이야'라는 차가운 냉소다. 화려하고 방탕한 표면 아래 희석되어가는 아메리칸드림은 정교하지 못하고 모순되어있으며, 이는 아티스트가 명확한 주제 없이 번민하고 방향 없이 부유하는 원인이 된다.

< Norman Fucking Rockwell! >엔 수많은 'Fuck'이 등장한다. 그 'Fuck'은 조소, 탄식, 분노임과 동시에 경탄, 쾌락, 허무의 감탄사로도 기능한다. 'Mariners apartment complex'의 짙은 퍼즈 기타 속 소녀는 '망가진' 채로 분노를 내뱉고, 러닝 타임 9분의 사이키델릭 신스 팝 'Venice bitch'의 퇴폐적인 커플은 빛바랜 노스탤지어 속 노먼 록웰과 파더 존 미스티, 토미 제임스의 1968년 'Crimson and clover'를 직접 언급하며 'Fresh out fucks forever'라는 칭호를 가져온다. 반대로 우울한 'Fuck it i love you'의 라나 델 레이는 간절하다. 화려한 네온사인 도시에서 대공황 시기의 유행가 'Dream a little dream of me'를 부르는 그는 기어이 '젠장, 널 사랑해'라 애절히 읊조리며 사라져 가는 시대정신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1920년대 ‘광란의 시대’ 뉴욕과 1960년대 캘리포니아


역설의 소용돌이를 잔잔히 읊어나가는 라나 델 레이가 또 하나 숨기지 않는 것은 그가 나고 자란 캘리포니아의 찬란한 태양이다. 염세적인 냉소와 간절한 기도, 연민의 시선과 치유의 낭만을 따스한 햇살로 보듬는 이 공간은 1960년대 히피들이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며 자유를 꿈꾼 동시에, 방종한 쾌락으로의 변질을 막지 못했던 아릿한 낭만의 공간이다. 말리부에서 태어난 라나 델 레이가 자연스레 체득한 '미국의 소리'는 메인 프로듀서 잭 안토노프의 손길 아래 잔잔한 피아노 인트로와 챔버 팝, 히피들의 사이키델릭과 섬세하고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분주히 오가며 이 부조리극의 훌륭한 작법으로 기능한다.

'The greatest'에서 비치 보이스와 데니스 윌슨을, 'Bartender'에서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쉬 등 대중음악의 전설을 언급하는 그의 꿈은 '미친 사랑(Crazy love)' 아래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보겠다는 낭만의 'California'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이 미래의 다짐은 곧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미국 최고의 앨범을 만들겠노라 낭만을 나눴던 과거형의 'The next best american record'로 쓸쓸히 아지랑이 진다. '모든 순간이 자장가' 같다는 'Happiness is a butterfly'의 낭만은 할리우드의 바인 스트리트와 술집에서 움켜쥘 수 없는 간절한 사랑으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작품은 셔우드 앤더슨의 고립, < 이지 라이더 >의 방랑보다 피츠제럴드의 개츠비와 가깝다. 일견 허무하고 공허할지언정 아티스트의 시선 속엔 사랑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비즈니스로 바라보는 대통령의 시대를 구원할 사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풍요와 낭만을 담아낸 슬림 애런스(Slim Aarons)의 포토북을 읽으며 아이패드 화면과 함께 오늘날로 돌아온 라나 델 레이는 '행복은 나 같은 여자가 갖기엔 너무 위험한 것 - 그러나 난 가졌다네(Hope is a dangerous thing for a woman like me to have - but i have it'를 차분히 읊조린다.



2013년 'Young and beautiful'을 부르며 영화 < 위대한 개츠비 >의 황망한 아메리칸드림을 수놓은 것이 6년 전이다. 오늘날 라나 델 레이는 미국이 겪었으며 또 겪고 있는 광란의 시대를 담담히 목격한 후, 허탈하고 텅 비어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자 한 편의 꿈꾸는 듯한 판타지를 써 내려간다. 때때로 이것은 모호한 환상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망각을 종용하는 2019년의 미국에 흐릿해진 이상을 다시금 새겨 넣으려는 분명한 의도가 중심에 단단히 존재한다.

21세기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꿈꾼 아티스트의 < Norman Fucking Rockwell! >에는 그들을 계승하는 각성의 메시지와 이를 전달하는 화자의 번민이 아름답고도 쓸쓸하게 녹아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처럼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트럼프 시대의 싱어송라이터가 그의 커리어에 역사성과 정통성을 추가하는 순간으로 요약할 수도 있겠다. 그레이스 슬릭, 조니 미첼, 닐 영,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쉬, 이글스의 옆에 라나 델 레이의 이름이 새겨진다.





Lana Del Rey ‘Doin’ Time’

Lana Del Rey ‘Fuck it, I love you & The Grea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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