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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Feb 17. 2020

아카데미 석권한 ‘기생충’, BTS의 그래미 수상은?

그래미의 과거와 현재로 살펴본 방탄소년단의 수상 가능성



지난 10일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쥐며 한국 문화 예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기생충’은 당초 수상이 유력했던 외국어 영화 부문은 물론 아카데미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까지 총 4개 부문에서 상을 휩쓸며,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 문화 시장을 선도하는 미국에서 확실한 경쟁력을 갖췄음을 증명했다.

‘기생충’의 쾌거를 지켜보며 음악 관계자들은 자연히 지난달 27일 있었던 제62회 그래미 어워드와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을 떠올렸다. 방탄소년단은 작년 <맵 오브 더 소울 : 페르소나> 앨범과 ‘작은 것들을 위한 시’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음악계 최고의 영예라 불리는 그래미 시상식에선 단 한 개 부문에도 후보로 오르지 못했다. 래퍼 릴 나스 엑스와 함께 시상식 도중 축하 무대를 꾸리며 한국인 최초로 그래미 공연을 펼친 아티스트라는 기록에 만족해야 했다.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업계에서는 ‘다음은 BTS’, ‘다음은 그래미’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래미보다 훨씬 높아 보였던 아카데미의 벽을 ‘기생충’이 돌파하며, 내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후보 노미네이트는 물론 수상도 노려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월 27일 새 앨범 <맵 오브 더 소울 :7>으로 컴백하는 방탄소년단이 과연 2021년 제63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트로피를 거머쥘 수 있을까.



BTS 원하는 그래미, 노미네이션 가능성 높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미네이션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방탄소년단은 2019년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알앤비 부문’ 시상자로 시상식에 첫 출연한 데 이어 올해는 축하 공연 무대에 섰다. 2년 연속으로 그래미가 그들을 필요로 했고 그 비중이 한 단계 올라갔다는 점에서, 이번 달 발표하는 새 앨범과 싱글이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는 전제 하에 당당한 ‘수상 후보’로의 전망이 가능하다.

미국 LA 타임스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전 ‘기생충’의 선전을 예상하며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원하는 것 이상으로 아카데미가 ‘기생충’을 바라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그간 아카데미는 2016년 시상식 직전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s_So_White)’ 소셜 미디어 해시태그 릴레이가 벌어질 정도로 백인 중심의 잔치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이듬해 흑인 감독 배리 젠킨스의 영화 <문라이트>에 작품상을 안긴 것을 시작으로 변화를 시도한 아카데미 시상식에게 한국의 ‘기생충’은 흑인은 물론 모든 유색인종을 포용하는 다양성을 강조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아카데미는 올해부터 ‘외국어영화상’ 부문을 ‘국제영화상’으로 새로이 명명하고, 역사상 최초로 비영어 영화인 ‘기생충’에 작품상을 선사하며 확실한 노선 변경을 보여줬다.

공교롭게도 그래미 역시 ‘백인 위주의 시상식’이라는 비판이 고민이다. 힙합이 팝 시장의 핵심 장르로 자리 잡았고 다국적의 뮤지션들이 대중음악계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데도 그래미는 항상 유색 인종 뮤지션들을 외면해왔다. 그래미를 주관하는 레코딩 아카데미의 회원들이 대부분 중년 백인 남성들이었던 탓이다. 지난해 배우 겸 뮤지션 차일디시 감비노의 ‘This is america’에 트로피를 선사하며 개선된 모습을 보이나 싶더니, 올해 신예 가수 빌리 아일리시에게 본상 4개 부문을 몰아주며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날이 갈수록 하락하는 시청률과 방송 수입, 비욘세 등 유명 뮤지션들의 불참으로 도태되어가는 그래미에게 방탄소년단은 매력적인 카드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보이그룹의 출연 및 후보 등재, 수상 소식은 그들의 거대 팬덤 아미(A.R.M.Y)는 물론 음악 팬들의 즉각적인 화제를 끌어올 것이 분명하다. 지난 2년간 꾸준히 카메라에 얼굴을 비춘 터라 익숙하지 않은 얼굴도 아니다. 레코딩 아카데미에게 방탄소년단은 ‘백인 잔치’라는 낙인을 지워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보이 그룹에게 보수적인 시상식, 변화는 시기상조?


혹여 본상 부문을 수상하기라도 하면 방탄소년단은 아시아권 최초의 그래미 어워드 본상 수상자가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들이 노릴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부문은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베스트 팝 듀오 / 그룹 보컬 퍼포먼스’다. 방탄소년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레코딩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관행 때문이다. 62년의 그래미 역사상 단 한 팀의 보이 그룹도 본상 부문을 수상하지 못했다. 백스트리트 보이즈가 2000년 <밀레니엄(Millennium)> 앨범으로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신인’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것이 최고의 기록이다.

2012년 신설된 ‘베스트 팝 듀오 / 그룹 퍼포먼스’ 역시 보이 그룹이 상을 받은 경우는 없었으나, 보이 그룹들이 자주 후보로 호명되며 수상 가능성을 밝힌 바 있다. 올해 ‘서커(Sucker)’로 후보에 오른 조나스 브라더스, 지난해 ‘돈 고 브레이킹 마이 하트(Don’t go breaking my heart)’로 이름을 올린 백스트리트 보이즈가 대표적이다. 첫 그래미 노미네이트를 노리는 방탄소년단에게 가장 적합한 첫 단계로 보인다.

그래미 어워드가 아카데미보다 훨씬 보수적인 시상식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기생충’ 이전에도 아카데미는 2016년 유색 인종 아티스트들의 대대적인 반발 이후 후보의 폭을 넓히고 과감한 수상을 진행하며 구태를 벗으려 노력해왔다. 반면 그래미의 노력은 미미했다. 2019년 시상식을 앞두고 여성, 유색 인종, 39세 이하의 신규 회원 900명을 새로 추가했으나, 전체 회원 수가 1만 2천 명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미 있는 변화라 보긴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레코딩 아카데미는 올해 시상식 일주일을 앞둔 1월 16일 최초의 여성 CEO 데보라 듀건을 해고했다. 그래미의 개혁을 위해 일해온 듀건은 해고 직후 레코딩 아카데미 내부의 성추행, 심사위원들과 아티스트들의 결탁을 폭로하며 레코딩 아카데미를 고소했다. 그래미의 관행과 보수적인 행보가 하루아침에 바뀌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미는 그래미, BTS는 BTS.


과거에는 한국 영화, 한국 음악의 이름이 세계적인 시상식에서 언급된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이 그래미 무대를 밟고,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석권하며 그 상상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그래미를 대하는 데 있어 ‘기생충’과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혁신하며 역사와 가치를 지켜나가고자 노력하는 아카데미에 비해 그래미의 운영은 보수적이고 중년 백인 중심의 시각은 변할 기미가 없다. 해를 거듭해도 ‘몰아주기 수상’과 생색내기식 후보 선정은 그대로다. 올해 비욘세에 이어 그래미가 사랑하는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 역시 불참을 선언하며 그래미의 권위는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만약 제63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레코딩 아카데미가 방탄소년단을 불러 후보로 선정하고 트로피를 안겨준다면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아쉬워할 것도 없다. 그래미에서 상을 받지 않아도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본인들이 지향하는 세계관과 메시지를 음악으로 성실히 전달하는 보이 그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로컬 시상식’이라 부른 것처럼, 방탄소년단도 굳이 ‘미국 로컬 음악 행사’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 하던 대로 꾸준히, 본인들의 음악을 들려주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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