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음악으로 답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전적인 할리우드 포스터 스타일의 앨범 커버 아래 예스러운 밴드 연주가 펼쳐지며 오래된 필름이 돌아간다. 빅딜 레코드, 지기 펠라즈, 비스메이저(VMC)를 거치며 오랜 시간 주류와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리를 지켜온 래퍼, 헤비 누아르 < 양화 >로 ‘당산대형’이라 불리게 된 빅 브라더, 그럼에도 이후 미디어에 적극 출연하며 논란의 중심을 가져온 보스, 딥플로우의 이야기다.
< 양화 >가 한국형 갱스터 영화를 닮았다면 < Founder >는 모든 부분에서 고전을 의도하고 있다. 우선 이 앨범의 소리는 808 베이스와 드럼의 힙합 비트가 아니다. 프로듀서 반루더(TK)와 밴드 프롬올투휴먼, 리얼 세션들의 손에서 빚어진 빈티지한 소울, 알앤비, 재즈와 블루스다. 유명 곡을 샘플링하거나 과거의 유산을 소환하는 대신 2010년대 중반 고스트페이스 킬라(Ghostface Killah)의 커리어가 연상되는 밴드 합작을 통해 손수 리프를 만들고 라이브의 느낌을 강조한다. 완성도에 대한 고집을 밀어붙인 결과물이다.
이는 작품이 딥플로우의 삶을 투영하여 펼쳐 놓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이기에 가능한 시도기도 하다. 유년기부터의 경험과 기억을 파편처럼 제시하여 좌우 교차하는 ‘Panorama’부터 마지막 ‘Blueprint’까지, 모든 기록은 ‘실제로 일어난 일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주요 시간대는 2010년대 초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던 시절부터 기획사의 사장직에 오른 현재까지다. “이 앨범은 내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다”라는 아티스트의 설명이 정확하다. 13개의 단편 영화 모음집이 아니라 38분짜리 한 편의 작품이다.
미디어와 타협한 후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은 이후의 결과물이기에 앨범은 자칫 대중에게 자기변호로 비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딥플로우의 영리한 화술은 그런 비판적 렌즈를 모두 거둬들일 정도로 효과적이다.
VMC의 경제적 곤궁 시기를 상징하는 숫자 ‘500’이 확장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막막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를 타개하기 위한 최소한의 소득이 ’Low budget’에서 극적인 성공가도로 연결되고, 그 성과를 멤버들과 함께 ‘품질보증’으로 치하한 후 복잡한 사업자 등록 과정의 ‘대중문화예술기획업’을 거쳐 ‘500짜리 계약서가 이제 뒤에 0이 아홉 개’의 ‘Big deal’로 거듭나는 이야기 구조가 대단히 통쾌하다. 뜻밖의 행운이나 허세 가득한 과시 대신, 절박함이 낳은 성공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업가 딥플로우’의 성장 스토리 이후엔 ‘인간 류상구’의 고백이 다가온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래퍼의 현실적인 시선이다. 넉살과 함께 지난 몇 년간의 성공 이면을 돌아보는 ‘Harvest’, ‘돈을 버는 거야 쉽지 / 근데 돈을 쓰는 건 더 쉽지’라는 ‘BEP’의 독백에는 교만이 없다. 오히려 ’36 dangers’처럼 자본과 미디어에 의해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된 힙합 신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씁쓸함이 짙다. 변화의 과정 속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부가가치세에 비유한 ‘VAT’의 비유는 특히 날카롭다.
정공법(正攻法)으로 승부했다. 미디어가 사랑하는 래퍼, ’30대 꺾인 래퍼 라인업'(’36 dangers’) 등의 틀에 갇히지 않고 베테랑, 사업가, 사장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삶의 궤적을 꾸밈없이 공개하며 깊이를 더한다. 서사를 뒷받침하는 기술적인 차원에서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공들이기’ 과정을 통해 숱한 범작들과 다른 차원에 위치한다. 사업가와 엔터테이너의 포지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음악으로 답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과연 ‘대형(大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