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전유 논란, '주의하자'를 넘어서.
울창한 숲길 사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빨간 스포츠카 앞에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는다. 차에서 내린 소녀가 눈을 감자 이윽고 얼굴에 하얀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머리 위 형형색색 꽃들로 장식된 뿔을 단 ‘숲의 아이’가 등장한다. 나무에 매달려, 드넓은 해변 위에서, 노란 해바라기 밭 위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소녀의 등에는 초록 나비의 날개가 돋아난다. 밤이 내려앉은 숲 속 수많은 늑대들과 함께하는 소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검은 줄무늬가 그어져 있다.
걸그룹 오마이걸의 멤버 유아의 솔로 데뷔 앨범 <본 보야지(Bon Voyage)>의 타이틀곡 ‘숲의 아이’ 뮤직비디오 속 장면들이다. 인트로의 거대한 늑대, 에스닉한 복장과 동물을 형상화한 장식, 자연의 친구라는 콘셉트에서 어렵지 않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모노노케 히메>, 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와 <모아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레퍼런스는 자연스럽게 케이팝 전반에 제기되는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논란과 연결된다.
문화적 전유란 특정 집단 구성원이 본인이 속하지 않은 특정 문화 및 정체성의 요소를 가져와 활용하는 현상을 뜻한다. 대개 논란이 되는 문화적 전유 현상에선 주류 문화가 비주류 문화의 특징을 과장하여 표현하거나 해당 요소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탐구 없이 단순 수단으로 활용하는 광경이 목격된다.
유아의 ‘숲의 아이’ 역시 네이티브 아메리칸 및 폴리네시아 원주민, 기타 요소들에 대한 문화적 전유가 아니냐는 비판이 일부 해외 케이팝 팬덤에서 제기된다. 작품만 놓고 보면 <본 보야지>는 자연과 도시를 오가며 인간 사회를 벗어나 태초의 세계를 동경하는 콘셉트로 잘 재단된 앨범이다. 하지만 ‘자연의 소녀’, ‘태고의 존재’라는 원시의 묘사를 위해 토착의 문화를 충분한 고려 없이 사용하고 서구의 단면화된 시각을 답습한 것은 정교하지 못하다.
영미권을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 요소들은 ‘환상적’, ‘이국적’, ‘원시적’인 분위기 조성을 위해 전유된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굉장히 빠른 시일 내에 토착민들을 보호구역으로 내쫓고 그들의 문화를 말살시킨 백인들이 제국주의 시대부터 오래도록 견지해왔고 전 세계로 식민화하며 확산한 시각이다. 주술사, 야성의 전사, 신비로운 마술 혹은 마법을 부리는 존재, 과거의 사람들. 원주민을 바라보는 대중화된 편견이다.
이 같은 비유는 토착민들을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야생의 사람들, 혹은 순진한 아이의 이미지에 고정할 위험을 품고 있다. 원주민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부족들마다 고유의 생활 및 행동 방식을 갖추고 그들만의 방법으로 수천 년을 살아왔다. 원주민들의 공간은 “나는 찾아가려 해 신비로운 꿈", “온몸엔 부드러운 털이 자라나고 / 머리엔 반짝이는 뿔이 돋아나는” 신비의 장소가 아니다.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다.
대개 문화적 전유의 경우 각 지역의 고유문화들을 맥락 없이 조화하거나 전유하기에 탈맥락의 영역에서 비판받는다. ‘숲의 아이’도 이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페이스페인팅, 활과 화살 등의 스타일링, <모아나>를 연상케 하는 폴리네시아 원주민, 혹은 아프리카 부족의 합창을 닮은 불명확한 언어의 후렴구는 명확한 지향점이 없다. 현대적인 드레스와 이국적인 장신구가 혼재되고 일본 아이누 설화를 바탕으로 한 <모노노케 히메>의 늑대까지 등장한다. 탈맥락은 각각 요소들의 뜻을 무시하는 문화적 전유의 가장 흔한 방식이다.
기모노 분장을 하고 AMA 무대에 등장한 케이티 페리, 아메리카 원주민을 테마로 삼은 2018년 주하이르 무하드의 오뜨 꾸뛰르 패션쇼 등 지금까지 문화적 전유 논쟁은 해외의 경우로 국한되어왔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케이팝 콘텐츠에 대해서도 지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노라조는 10년 전 히트곡 ‘카레’가 인도 케이팝 팬들에 의해 비판받자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고, 블랙핑크는 ‘How you like that’의 뮤직비디오에서 논란이 된 조형물을 삭제했다. 이슬람 모스크 사원 배경에서 노래를 한 (여자) 아이들 역시 논쟁의 대상이 됐다.
그럼에도 케이팝 팬덤 내에서 문화 전유 논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양극화되어있다. 어느 한 편에서는 맹렬하게 콘텐츠의 문화적 결례 및 민감한 요소를 지적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반면 반대편에서는 이를 무시하거나 반례를 들어 논란 자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하고, 해외 팬덤에 의견을 국한시키는 경우도 있다. 2010년대 초중반부터 거셌던 문화 전유 논란은 아직도 한국에선 낯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인종갈등과 원주민 학살 등은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케이팝이 아시아 및 남미, 유럽 시장에서 인기를 얻은 지는 꽤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큰 고민 없이 블랙페이스 분장을 하고 세계 각국의 분장을 가져오며 콘로우 및 드레드 헤어스타일을 가져간다. 사실 이것은 케이팝이 콘셉트 및 이미지 위주로 기획되고 공백기가 거의 없이 급하게 전환되는 탓도 있다. 해외의 경향을 빠르게 가져와 콘텐츠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전유의 요소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케이팝이 이런 문제에 대해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현재 케이팝은 글로벌 시장에서 제3세계 및 서구세계 이민자들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는 새로운 장르 및 문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난주 트위터가 공개한 ‘#KpopTwitter 2020 월드맵’에 의하면 가장 많은 케이팝 관련 트윗을 쓰는 나라 1위는 태국이다. 2위 한국을 제외하면 인도네시아, 필리핀,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전 세계를 아우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팝 시장보다 케이팝에 제기되는 문화 전유가 제3세계 팬들에게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물론 문화적 전유를 지나치게 확대 적용하여 비판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인 만큼 지금부터라도 콘텐츠 기획 및 아티스트 교육에 있어 사전 조사와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지난 25일 걸그룹 유얼스가 유튜브에 업로드한 ‘헤어스타일 속 차별’ 강의는 문화적 전유 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다. 영상 속 멤버들은 전문 강사에게 헤어스타일 속 문화적 전유의 요소들을 교육받고, 그것이 왜 차별인지를 분명히 인지받는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상징과 국적불명의 코러스를 사용하지 않아도 자연 속 ‘숲의 아이’를 그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얼굴에 검은 칠을 하지 않고도, 곱슬머리를 하지 않고도 흑인 음악과 문화를 표현할 수 있다. 독특하다는 이유로 ‘카레풍 멜로디’와 인도의 장신구 및 신 조형물을 전시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영미권 음악 시장이 글로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뒤늦게 노력하는 지금, 케이팝은 한층 더 빠르고 진보적으로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케이팝이 현재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 잡아가는 제일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