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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Oct 03. 2020

'우리가 나훈아 볼 나이는 아닌데.'

물질주의, 청년, 미학, 내일의 파산


추석 전 날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께서 tv조선 '미스터 트롯'을 보고 계셨다. 이어 나훈아 콘서트가 예정되어있다고 하니 아버지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아직 나훈아 볼 나이는 아인데…”

1980년대에 20대를 보낸 아버지께서는 넋두리 삼아 김완선의 충격, 서태지의 혁신, 이문세의 낭만, 신해철의 연대감, 그리고 여러 발라드 가수들을 언급하셨다. 그나마 등장한 이름이 아이유였다. BTS가 미국에서 1위다, 케이팝 가수들이 인기다. 이리저리 이야기를 건네도 그 수치는 아버지께 정말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윽고 무대 위 칠순의 나훈아가 오르자 블루투스 마이크까지 꺼내는 잔치판이 벌어졌다. 확실히 나훈아 콘서트는 대단했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기차에 ‘명곡에 명곡이 실려’ 왔고 세계 각지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스크린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 간드러진 멘트 하나하나에 부산 사람들인 우리는 속된 말로 표현 하나마다 ‘안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의외였던 건 SNS 속 또래들의 반응이다. 보아하니 나훈아 콘서트는 20대들에게도 실시간으로 새로운 세계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확실히 그런 거대한 규모와 맥락 없는 장엄함, 기묘한 문화코드 활용은 우리 세대의 비대면 콘서트와 비교가 불가능한 정도로 상당한 충격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훈아라서 가능한 것이다. KBS의 중간광고 없는 2시간 30분 공연, 자본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대규모 투자. 고향을 노래하며 언제나 기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남진을 앞서갔던, 화려한 엔터테인먼트로 언제나 정상을 지켰던, 나훈아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기성에 대한 저항으로 20대가 앞세울 것을 대라면 많은 이들이 앞서도 언급했던 아이유와 드디어 공중파에 진출한 '문명특급'을 꺼낸다. 그러나 김완선과 서태지, 이문세를 기억하는 아버지가 틴탑의 '향수 뿌리지 마'와 티아라의 '롤리폴리'를 보며 청년 문화의 저력을 느낄까? '삐리빠빠'가 '고향으로 가는 배'만큼의 어떤 시대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곡인가. '만만하니'가 '사랑'만큼의 어떤 추억을 대표할 수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나훈아 콘서트나 문명특급이나 공통점은 미학의 파산, 음악의 변두리화다. 칠순의 나훈아가 그리스 철학자와 호형호제를 외치자 그것이 전세대 유행으로 거듭난다. '내가 사랑에 빠졌어요'라며 즐겁게 춤추는 나훈아 뒤 노출 심한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옷을 갈아입혀주어도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1970년대 이촌향도와 고도성장 속 시대를 위로했던 과거 유행가와 히트곡들에 비하면 최근 노래들은 정말 초라해 보이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아 테스형'이 재미있으니, 그걸로 된 거다.


문명특급의 '숨어 듣는 명곡'은 한 술 더 떠 2010년대 케이팝의 기형적인 구조와 천편일률 제작 시스템에 추억이라는 면죄부를 발행한다. 왜 그게 당당히 듣는 노래가 아니고 숨어 듣는 명곡이었겠는가. 본인들도 그 저열함을 인정하면서도 '더 이상 숨어 듣지 마라'는 당부를 남긴다. 3분짜리 히트를 노린 공장제 히트곡들은 한 시간을 대표할 순 있겠지만 그게 20대를 대표하는 콘텐츠로 남는다면 굉장히 슬픈 일이다.


하지만 '문명특급'에는 짙은 패배의 정서가 깔려있다는 점이 나훈아와 다르다. MZ세대 취향을 유튜브 콘텐츠로 적극 반영하여 벼려냈다는 독특함에는 자신들이 듣고 즐긴 콘텐츠가 절대 우수하지 않다는 자조와 푸념, 실패가 동반된다. '숨어 듣는'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이 쇼는 키치의 영역에 가깝다. "밀레니얼들은 구시렁대어도 시키면 열심히 하는 게 문제"라는 재재의 발언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나훈아는 성공이자 권력이다. 문명특급은 내일 없는 청춘의 '좋았던 옛날 추억'이다.



모두가 옛날 생각과 옛날 마음을 갖고 옛날의 노래를 부르며 추억을 되새긴다. 해외에도 레트로가 유행인데 우리만 그러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라들에서는 두아 리파와 위켄드, BTS가 1970년대 디스코를 하는데 우리는 나훈아의 디너쇼가 최고의 히트를 기록하고 트로트 어워즈가 열린다. 그들이 당당히 제2의 젊음을 누리는 가운데 정작 젊음은 (그마저도 기성이 만든) 케이팝을 추억으로 소비하며 '좋았던' 십 대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것이 엔터테인먼트의 측면에서는 아주 성공적이고 훌륭한 기획일진 몰라도 우리에게 미학의 가치와 심미성 및 독창성은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다. 독창성과 심미성 대신 규모의 경제가 밀레니얼과 신세대를 재단하는 척도로 평가된다. 그 정의를 내리는 것 또한 MZ가 아니라 기성으로 분류되는 세대다.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술에 관심을 두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 여유 없이 살아왔으니까. 음악은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다. 비평 역시 물질주의적 성격으로 굳어진다.


당장 즐거웠던 '테스형' 이후 50대에 나훈아를 보는 세대로 엮여버린 아버지의 넋두리가 머릿속을 쉬이 떠나지 않는다. 40년 후 BTS의 디너쇼와 문명특급 리사이틀이 열린다면 나의 다음 세대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이런 일련의 콘텐츠에서 한국 현대사의 수출주도 성장 정책과 성장 주도형 자본주의 배경을 넘어 '좋은 노래', '좋은 멜로디', '멋진 가창' 등을 논하는 것은 큰 사치처럼 느껴진다.


과잉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불길한 생각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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