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음악 결산] (2) 경연장에 나온 트로트·가요·힙합
2020년은 2009년 <슈퍼스타 K> 이후 10년 만에 오디션 프로그램 제2의 전성기로 기억된다. 지난 10년간 케이팝, 트로트, 힙합, 기성 가요 등 다양한 형태의 경연 및 서바이벌 방송이 인기를 끌었지만 올해는 동시다발적으로 폭넓은 프로그램이 제작되어 각기 다른 음악 소비 계층을 공략했다.
일부 케이팝 그룹과 인기 아티스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가수들이 경연 프로그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컴백 전쟁:퀸덤>의 후속작으로 기획된 엠넷의 남자 아이돌 그룹 경연 <로드 투 킹덤>, 무명 실력파 가수들에게 기회를 부여한다는 콘셉트의 JTBC <싱어 게인-무명가수전>(이하 <싱어 게인>), 포크 아티스트들을 대상으로 한 엠넷 <포커스> 등 포맷과 장르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트로트 열풍을 이끈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이하 <미스터트롯>)과 긴 방송 이력으로 인지도와 팬층을 확실히 구축한 엠넷 <쇼미더머니9>는 2020년 가요계의 주목할만한 유행과 흐름을 환기하기도 했다.
수많은 참가자들 가운데 심사위원들의 결정을 거쳐 최종 우승자가 등장하는 형식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성격은 꽤 달라졌다. 2009년 <슈퍼스타 K> 이후 오디션 프로그램은 재야의 고수나 기성 아티스트가 아닌, 아마추어와 일반인 참가자들을 스타로 만들어주는 등용문 성격이 강했다.
반면 오디션 프로그램이 고착화된 2010년대 말부턴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가수들과 연예인, 신예 아티스트들까지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아지며 신인 발굴보다는 미디어 노출과 팬층 확보의 중요 수단으로 선택하는 전략적 거점지대가 되었다. 특히 2016년 케이팝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리즈에서 조작 정황이 포착되며 더는 과거와 같은 도제식 교육과 훈계, 유명세에 따른 지위를 강요하기 어려워진 것도 주요한 요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올해 화제를 불러 모은 오디션 프로그램은 TV조선의 <내일은 미스터트롯>, JTBC의 <싱어게인>, 엠넷의 <쇼미더머니9>다. 세 프로그램은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 유튜브 및 소셜 미디어를 통한 2차 콘텐츠 생산을 통해 2020년 가요계에 선명한 족적을 남겼다. 동시에 이들이 주도한 유행 속에서 음악계가 고민해야 할 길 역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해 <내일은 미스트롯>의 인기를 그대로 이어간 <미스터트롯>은 올 한 해 최고의 화제 프로그램이었다. 최고 시청률 35.7%를 기록한 것은 물론 후속 프로그램 <사랑의 콜센타> 역시 온라인 영상 조회수 5억 6천만 회, 회별 평균 조회수 3,300만 회로 2020년 온라인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방송이 되었다. 임영웅, 영탁, 김호중, 이찬원 등 스타들이 탄생했고 케이팝 팬들의 조직적인 홍보에 풍부한 구매력까지 갖춘 중장년층 팬덤은 어마어마한 세일즈를 안겼다.
트로트는 <내일은 미스터트롯>으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얻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 속 뿌리 깊게 내려진 트로트의 전통은 21세기에도 틈틈이 발현되어왔으나 일회성 유행에 그쳤을 뿐 주류로 보기는 어려웠다. 매체의 지원을 통해 장르 존재감을 확실히 세운 해가 바로 올해였다.
하지만 이 현상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TV조선의 성공 사례를 본떠 수많은 방송사들이 제작한 트로트 프로그램은 대중에게 ‘트로트 피로감’을 안겼다. 임영웅, 영탁, 김호중 등 스타들이 굳은 팬덤의 지지 아래 좋은 성적을 올린 것은 사실이나, 세대를 아우르는 신곡 대신 <사랑의 콜센타>에서 트로트가 아닌 장르의 노래를 부르며 인기를 얻는 것이 현실이다.
트로트 신이 지금의 기회를 도약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는 흔한 레퍼토리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 대중음악 속 ‘성인가요의 미학’을 따르는 좋은 신곡과 작품, 이를 위한 아티스트들과 관계자들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렇지 않다면 트로트는 작금의 인기를 상실하고 ‘미디어가 불러온 유행’으로만 기억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JTBC <싱어게인>의 선전은 트로트 범람에 지친 세대의 니즈를 공략했다. 사실 현재의 4~50대에게 트로트는 <미스터트롯>이 있긴 하나 희미한 음악일 뿐 젊은 세대에 향유했던 문화는 아니다. 2~30대 역시 트로트에 대한 악감정이 없을 뿐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기지는 않았다. 이들이 들었던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의 가요를, <비긴어게인>,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을 제작하며 음악 프로그램 노하우를 쌓은 JTBC가 그 시절 가수들과 신예, 인디 신의 아티스트들을 한 데 모아 제작한 프로그램이 바로 <싱어게인>이다.
앨범 발매 경력이 있는 출연자들에게 ‘무명가수전’이라는 제목은 언뜻 가혹하게 들린다. 하지만 <싱어게인>은 위계를 줄이는 방향을 택하며 심리적 저항감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송민호, 규현, 이선희, 김종진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출연자들의 무대를 평가하지 않고 즐기며, 이름 대신 번호로 호명되는 참여 아티스트들 사이의 차별이나 대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싱어게인>은 오디션, 서바이벌보다 <비긴어게인>처럼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며, <슈가맨>의 속성과 MBC <복면가왕>의 음악 퀴즈 추리 포맷을 동시에 가져오는 경연 프로그램으로 보는 것이 알맞다.
트로트 유행의 반감으로 혜택을 본 것은 분명 하나 그것만으로 <싱어게인>의 화제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난 6회 방송이 수도권 유료가구 기준 시청률 8.1%(닐슨코리아)를 기록하고, 63호 가수의 ‘누구 없소’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수는 1,243만 회, 30호 가수의 ‘Honey’ 영상 조회수는 704만 회를 기록했다. 결국 오디션 프로그램의 형식보다 프로그램의 주제, 기획의 깊이, 프로그램 만듦새 등 ‘잘 만든 프로그램’이 성공한다는 진리를 알려준 방송이다.
<쇼미더머니9>는 전 시즌 <쇼미더머니8>의 부진을 만회하며 다시금 영향력을 입증해보였다.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저조한 시청률, 출연 아티스트들의 대마초 흡연 논란 등 암초가 많았으나 회차를 거듭할수록 화제를 모았고 ‘VVS’, ‘CREDIT’ 등의 히트 싱글을 만들어내는데도 성공했다. 전 시즌에 참여했으나 주목받지 못했던 머쉬베놈, 먼치맨, 래원, 원슈타인과 더불어 베테랑 래퍼 스윙스, 신예 미란이까지 다양한 인물을 각인한 것도 수확.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쇼미더머니>에는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지 않았고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들도 과거에 비해 인상적인 곡을 만들어내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무대를 잃은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를 알리며 상황이 반전됐다. 신예들과 더불어 자이언티, 기리보이, 다이나믹 듀오, 코드 쿤스트, 스윙스 등 <쇼미더머니>를 보며 자라온 세대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래퍼들이 복귀하며 힙합 팬들을 결집한 것 역시 성공의 비결이었다.
비록 지난 아홉 번의 시즌 동안 논란도 많았으나, <쇼미더머니9>의 성공은 결국 이 프로그램이 한국 힙합 신에서 새 유행을 트고 신인들을 시장 중심에 옮겨놓으며 세대교체를 진행하는 ‘빅 이벤트’ 현장임을 증명했다. 트로트, 기성 가요와 달리 힙합은 현재 젊은 세대 음악 문법의 중심이며, 꾸준한 창작과 노력을 통해 스타가 되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성공 사례들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젊은 아티스트들의 커리어는 현재 진행형이며 왕성한 창작으로 경연곡, 싱글, 앨범을 발매하고 있다.
‘딩고 프리스타일’, 네이버 NOW의 ‘랩하우스’ 등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에 힙합 콘텐츠 지위를 잃어가던 엠넷에게도 <쇼미더머니9>의 성공은 의미가 깊다. <고등래퍼>의 네 번째 시즌 방영을 앞둔 방송국은 이번 시즌에서도 논란이 되었던 불합리한 경연 진행을 타파하고 공정한 경쟁 시스템을 확립해 ‘래퍼들이 노는 판’으로의 성격을 확실히 깔아줄 필요가 있다. 경연 도중 저스디스가 이야기했던, 이른바 ‘잼민이’라 불리는 MZ세대들의 지지를 얻는 거의 유일한 경연 프로그램이 바로 올해의 <쇼미더머니9>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