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승자여야 하는 케이팝 레트로 세계관
SBS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의 케이팝 시리즈에서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명곡’이다. 문명특급과 연반인 재재는 ‘숨듣명(숨어서 듣는 명곡)’을 양지로 끌고 나와 ‘컴눈명(다시 컴백해도 눈감아줄 명곡)’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과거 ‘토토가’와 ‘응답하라’, 복면가왕, 히든싱어, 슈가맨 등 프로그램과 최근의 ‘놀면 뭐하니?’의 레트로 흐름까지 대놓고 특집 이름에 ‘명곡’이라는 이름을 쓰진 않았다. 불후의 명곡 정도가 있을 텐데 이 프로그램은 케이팝이 등장할 장소가 아니다.
반면 케이팝 리바이벌 세계관에서는 ‘명곡’을 전면에 당당히 내세운다. 키치한 결과물 혹은 B급 감성 노래들은 ‘숨듣명’이고, 세련되고 멋진 노래였지만 성과가 못내 아쉬운 곡들은 ‘컴눈명’이다. 히트곡이라고 명곡인 것은 아니며 명곡이라도 유명세를 얻지 못할 수 있는 것인데 케이팝에서는 모든 기록을 아름답게 되짚는다. 향후 문명특급 시리즈에서 앞 두 글자는 자유로이 추가되겠지만 뒤의 ‘명’은 쉬이 바뀔 것 같지 않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그룹은 컴눈명 복기 대상에서 차순위다. 소녀시대, 투애니원, 에프엑스, 빅뱅, 슈퍼주니어 등이 해당된다. 2PM은 ‘10점 만점에 10점’이 아니라 ‘우리집’이어야 하고 샤이니는 ‘Ring Ding Dong’이 아니라 ‘View’다. 애프터스쿨도 음악방송 1위 곡 ‘너 때문에’가 아니라 ‘Bang!’이다. 그래서 숨듣명과 컴듣명은 ‘토토가’와 다르다. 명실상부한 유행가를 다시 가져왔던 ‘토토가’와 달리 케이팝의 리바이벌은 당대 인정받지 못하거나 짧은 전성기를 누린 가수들의 결여된 점을 채워주는 의미에서의 재소환, 재구성, 재해석이다. 이런 노래들도 ‘명곡’으로서 지위를 회복시켜달라는 무언의 주장이다.
컴눈명 라인업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 성격이 더 구체화된다. 첫째는 당대에도 어느 정도 반향은 있었으나 한 해를 휘어잡았다 수준의 히트곡은 아니고, 커리어 초기 곡이거나 (오마이걸 ‘Closer’, 애프터스쿨 ‘Diva’) 전환기의 곡이며 (샤이니 ‘View’, 2PM ‘우리집’), 아티스트 이름값과 노래의 퀄리티에 비해 어떤 요인에서인지 아쉬운 성적을 거둔 노래들이다 (가인 ‘카니발’, 빅스 ‘사슬’, 애프터스쿨 ‘Bang!’).
컴눈명과 케이팝 팬들의 세계에서 이 노래들은 작사가, 작곡가, 멤버 모두가 최선을 다했으나 생각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이다. 희미한 잔향이나 자료화면으로 남아있는 세대의 기록처럼 멀리 있지 않아 사실 아직까지도 곳곳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지만 언제나 일말의 아쉬움을 품고 듣게 되는 노래들이다. 나의 세대와 과거를 채워준 노래이기에 ‘더 잘 됐어야 한다’는 동료의식이 발동된다.
명곡의 또 다른 기준은 ‘기강을 잡는다’는 표현에서 발견된다. 컴눈명 특집을 본 팬들은 애프터스쿨, 2PM 등 10년 전 그룹들의 무대에 감탄하며 ‘기강’이라는 일종의 집단적 정수를 공유한다. 칼 같은 군무와 독기 어린 퍼포먼스, 힘차게 랩을 뱉고 ‘고음 셔틀’ 파트처럼 혼신의 힘을 내뱉는 것이 케이팝의 핵심이라는 믿음이다. 팀과 소속사 단위의 전략 아래 멤버 각자에게 고유의 확실한 방향을 제시하고 역할을 수행시키는 오늘날 케이팝 시스템과 비교하면 과거 그룹들의 퍼포먼스나 열정은 한 수 위처럼 보인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한국에서 필수적인 명곡의 조건이다.
컴눈명이 숨듣명과 다른 점은 이 복고 열풍에 열광하는 이들에게서 호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개인적인 이유와 더불어 가치 회복 및 역사 다시 쓰기의 철학이 강하게 묻어난다는 것이다. 제목처럼 숨듣명은 당시 숨어서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 곡들이었고 당사자들도 그 패배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반면 컴눈명은 권위와 존중을 요구한다. 현역으로도 손색없는 무대를 펼쳐 보이는 이들에게 컴백의 당위를 부여한다. 이 날 출연한 패널 중 전소미, 최유정, 이대휘는 애프터스쿨 가희에게 트레이닝을 받았으며 '케이팝 교수님' 부승관이 브이라이브에서 음악 방송을 복음처럼 챙겨보던 시절이 이들의 전성기였다. 당대에는 애매한 반응이었지만 컴눈명 이후에는 어떤 반석에 오른 모습이다. '케이팝 르네상스를 다시 일으키자'는 표어에 정확히 부합한다.
컴눈명 콘서트와 이에 열광하는 이들의 모습에 오늘날 케이팝 시장의 모습이 겹치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이미 현재 케이팝 시장 전체가 거대한 ‘숨듣명’과 ‘컴눈명’이다. 올해 최고의 히트곡은 2017년에 나온 ‘롤린’이다. SM이 유영진을 다시 전면에 내세워 20년 전 SMP를 소속사 아이덴티티로 확고히 한다. 미래주의를 지향하는 에스파에 대한 이야기가 온통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있지에게서 미스에이가 겹치는 이유는 우연이 아니며 트와이스의 전성기를 이끈 블랙아이드필승은 그들의 정수를 ‘완전 카피’한 스테이씨를 키워 흔치 않은 신인 그룹의 성공을 이끈다. BTS는 입대 전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안전한 행보를 택하며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아래 미니 BTS임을 숨기지 않는다. 케이팝은 더욱 마니아 위주의 음악이 되어가고 팬덤 위주의 소비를 지향한다.
케이팝의 혁신과 창조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도전적인 자세는 2010년대 말 마무리되었고 현재는 과도기 혹은 안정세에 접어들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곡 수급 과정, 디렉팅, 멤버 선발 등 모든 면에서 ‘컴눈명’ 활동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다만 그 때나 지금이나 케이팝 시장은 레드 오션이고 지나치게 포화되어 아무리 최선의 결과물과 치열한 노력에도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게 밀려난 노래들은 컴눈명, 숨듣명 콘텐츠로 다시 소비되며 사라지지 않고 알고리즘과 시장 저변을 맴돈다.
개인적으로는 숨듣명에 비해 컴눈명 콘서트는 재미가 덜했다. 소개된 노래와 아이돌 그룹들은 완전히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간 이들이 아닌지라 노스탤지어 심리도 적었고 몇몇 곡을 제외하면 ‘지나고 나면 언제나 좋았어’ 류의 해석이라 재미가 크지 않았다. 르네상스라 칭하기에 그 시기 음악의 작품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특히 ‘기강을 잡는다’ 논리는 ‘라떼’와 크게 다르게 들리지 않았다. 근사한 수트를 입고 무대를 꾸민 나인뮤지스는 데뷔 초 사장에게 뺨을 맞았고 애프터스쿨은 활동 기간 내내 소속사에게 외면받고 콘셉트 및 활동이 중구난방 했던 그룹이었다. 절박한 심리로 극한까지 몰아붙여졌던 이들의 눈빛과 현재 안정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그룹들의 태도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게 기강이라면 영원히 안 잡히는 게 낫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로 케이팝 팬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최근 케이팝에 이성적으로는 동하면서도 감정적으로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기술과 규모 모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서툴더라도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현 케이팝 시장이 대단히 선진적으로 운영되며 공정한 경쟁을 유지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거대한 성과에 가려 연습생 인권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오디션 개미지옥은 현재 진행형이다. ‘총공’은 스트리밍 시장에서만 자취를 감췄을 뿐 또 다른 형태의 스트레스로 존재한다. 케이팝 그룹의 인기와 수명은 거듭 짧아진다. 과거처럼 팬덤의 힘으로 차트 1위에 오르고 세대 구분 없이 모두가 따라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를 만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문명특급은 케이팝에 허락되지 않았던 인간적 면모와 인간적 배려를 통해 가장 공감할 수 있고 영향력 있는 케이팝 채널이 되었다. 이들의 '케이팝 진심'을 증명하기에 케이팝 리바이벌은 간편하고도 강력한 기획이다. 그들이 소환하는 노래들이 정말 명곡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정사정없이 콘텐츠를 쏟아내며 꾸준한 학습과 소비를 요구하는 케이팝 시장에서 행복과 추억으로 가득한 피난처가 문명특급 채널이다. 그것만으로 팬들은 만족한다.
그렇다면 음악을 이야기하는 나 같은 경우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까. 소비자 위주의 시장에서 중재자로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한가. 과하도록 엄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모든 해석이 아름답고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생산자와 소비자의 대변인을 자청하자 모든 지나간 노래들을 명곡으로 부르는 시대가 열렸다.
'숨어서 듣는', '컴백해도 눈감아줄' 등 여타 수식 없는 명곡은 가능한 시대인가. 문명특급이 즐거움을 맡는 사이 지루함을 담당하는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더 재미있게 풀어주거나, 그럼에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거나. 고민하기 전에 일단 문명특급이 만든 컴눈명 쉘터에서 잠시 쉬어가본다. 훗날 '컴눈명'으로 소개될 최신 노래들을 열심히 들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