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DER : CARNIVAL이 제시하는 케이팝의 '사육제(謝肉祭)'
엔하이픈의 정체성은 ‘연결’이다.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문장을 만드는 ‘하이픈’을 그룹 이름에 새겼다.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랜드’의 경쟁을 거쳐 연습생에서 아티스트로 거듭난 이들은 전 세계 케이팝 팬들과 소통하며 연결되고자 발을 넓힌다. 풍부한 오디션 경험의 CJ ENM과 BTS를 통해 강력한 서사의 힘을 선보였던 HYBE 역시 연결되어 '빌리프랩'이라는 새 이름으로 엔하이픈을 프로듀싱한다. 경연 프로그램의 결과를 호소력 짙은 내러티브로 연결하고 퍼포먼스와 음악으로 현실에 옮겨놓는 데 익숙한, 현재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프로듀싱 기업들의 합작이다.
지난해 11월 첫 앨범 'Day One'은 '데뷔'라는 단어를 음악으로 풀어내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은 작품이었다. 멤버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체성을 강조하곤 하는 케이팝 시장에서 데뷔의 꿈을 이룬 것이 회사에 의해 '주어진 것인지' 혹은 소년들이 쟁취한 것인지를 고민한 ‘Given-Taken'같은 서사는 분명 독특했다. ‘아이랜드’의 거대한 알 모양 세트장을 지나 네모난 큐브 속으로 과감히 뛰어든 ‘Let Me In’, 밝은 분위기로 활발한 틴에이저의 면모도 보여준 '10 months’까지. 모범적인 자기소개서이자 포부를 담고 있는 데뷔작이었다.
'BORDER : CARNIVAL'은 'Day One'의 아우트로 ‘Cross The Line’과 연결된다. 왈츠 풍 4분의 3박자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진행되다 급격하게 피치를 올리며 마무리됐던 곡을 따라 기괴한 첫인사 'The Invitation'에는 많은 비밀이 담겨 있다.
사이키델릭한 악기 활용과 야성적인 리듬은 MGMT와 테임 임팔라를 연상케 하는 2010년대의 사이키델릭 록이다. 2000년대 중후반 EMO 음악, 사이키델릭 록, 신스 팝, 당시 신선한 젊은 밴드로 사랑받던 음울한 '중2병' 감성을 예고하는 듯 불안정하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Reflektor'가 떠오르는 리듬과 멜로디인데, 앨범 제목이 'Carnival'이라는 데서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브라질 카니발 축제로 옮긴 1958년 작 '흑인 오르페'로부터의 영향이 묻어난다. 복잡하고 낯선 세상, 흥겹고 즐겁지만 동시에 비극적인 퍼레이드. 이제 케이팝은 그 자신의 구조적 모순과 비인간적인 경쟁 및 비극까지도 신인 보이 그룹의 서사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Drunk-Dazed’는 생경한 충격이다. 물론 2000년대 록을 사랑한 내게는 완벽히 취향인 곡이다. (촬영 도중 Danny는 패닉! 앳 더 디스코를 이야기했다.). 'Given Taken'이 수수께끼 같았을지라도 구성 자체는 비장하고 차분한 면모가 있었던 반면, 'Drunk-Dazed'는 정말로 Dazed한 심경과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하는 야성의 곡이다. 캄캄한 지하 세계로부터 동료를 구출해 지상으로 올라가는 신인 그룹에겐 신화 속 오르페우스처럼 뒤를 돌아볼 여유와 시간 따윈 없다. 빛나는 이 순간, 더 화려할 내일을 꿈꾸며 광기의 붉은 눈을 빛낸다.
멤버들은 프랑켄슈타인, 좀비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무대로 옮기며 도취되어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다. 동시에 보컬 플레이는 냉정하다. 녹음에 2시간 이상이 소요됐다는 '아름답고 황홀해' 인트로는 정말 황홀하다. 깜짝 놀랄 신스 사운드와 야성적인 808 베이스 비트로 꽉 찬 유령의 집을 덤덤하게 통과하는 모습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케이팝 아이 돌으로의 이 순간, 축복과 저주의 가치판단을 내리기 전 일단 뛰어들고 만끽하는 것이 먼저다.
'Carnival'은 영화 '그것' 같기도 하지만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와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과 더 닮아있다. 틴에이저들이 열광할,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흥미진진한 모험 활극의 요소들이 가득하다. 레게 리듬을 더한 알앤비 곡 'Fever'에서 엔하이픈이 뱀파이어로 분하는 이유가 다시 한번 선명해진다. ‘너 때문에 온몸이 타올라’ 같은 애절한 메시지는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를 보며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어린 주인공들의 마음에 공감한 이들이라면 쉬이 지나치기 어려운 지점이다.
고독, 아픔, 갈등은 팬들과의 깊은 유대감을 위한 엔하이픈의 테제다. 그러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Not For Sale'같은 순간과 특별한 인간이 되겠노라 다짐하는 '별안간' 등이 입체적인 면모를 더하고 있다. 앰비언트 아우트로 'The Wormhole'까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한국에서 ‘아이랜드’의 인기는 크지 않았다. 냉정한 구분짓기와 무한 경쟁 서사, CJ ENM의 원죄로 인해 여론은 비판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덕분에 CJ ENM과 HYBE는 연습생 팬덤 간의 충돌, 프로그램에 대한 과한 기대로부터 자유로운 채로 글로벌 온라인 생중계 시청자 수 4,300만 명, 디지털 클립 조회수 1억 8,600만 뷰의 누적 조회수와 181개 국가의 투표 참여 데이터를 활용해 시작부터 커다란 글로벌 팬덤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프로듀스> 시리즈를 통해 오디션의 성장 서사를 그룹으로 연결해 팬덤을 확보한 CJ ENM의 노하우, 군데군데 디테일을 심어놓는 하이브의 치밀한 자료 조사와 활용, 숱하게 쏟아지는 2차 콘텐츠들은 엔하이픈에게 틱톡,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브이라이브의 5대 SNS 총 구독자 1,440만 명을 안겼다. 지난 11월 발표한 데뷔 앨범 'BORDER : DAY ONE'이 역대 케이팝 보이그룹 초동 판매량 3위를 기록한 데 이어 'Carvinal' 앨범은 선주문 45만 장을 기록했다고 한다.
엔하이픈의 활약을 보며 케이팝 시장이 우리가 측정하고 예측하며 우려를 표할 영역 그 이상의 커다란 문화 현상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한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진심의 유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굳건한 글로벌 팬덤의 지지 아래 그런 '진정성'의 문제조차도 더욱 멋진 서사를 위한 좋은 소재가 된다. 회사는 연습생들을 사전 교육시키는 대신 단계적 성장의 단계를 공개하며 팬들과 함께하는 대규모 퍼레이드를 기획한다. 이들의 '연결'은 일종의 '흡수' 또는 '잠식'이다.
빌리프랩과 엔하이픈은 너무도 근사하게, 즐겁게, 마음껏 자유롭게 취하고 어지러워진다. 그 엄격한 방탕함이 글로벌 팬들에게 24/7 멈추지 않는 해방의 사육제(謝肉祭)를 제공한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고난의 사순시기(四旬時期)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지금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