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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Aug 25. 2021

잔나비 '환상의 나라', 쇼는 계속되리.

우리 시대의 위대한 쇼맨


야심 가득한 <환상의 나라>를 듣고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 <물랑 루즈>를 떠올렸다. 영화 속 삽입곡의 제목처럼 ‘스펙타큘러’한 앨범은 장엄하고 화려하며 쉴 새 없이 장면을 전환하고 마법과 현실을 바삐 오간다. 신화적 서사와 초현실적인 연출로 중무장한 영화의 원초적이고 아름다운 무대처럼, 앨범 역시 웬만한 야심과 실행력으로 구현하기 힘든 아이디어를 현실로 이끌며 정교한 가상을 가꾼다. 빛나는 열정과 젊음 한 자락이 영원할 것이라 외치는 숭배와 찬양의 음악은 밴드의 경험과 맞물리며 숭고한 판타지로 매듭지어진다. 아름다운 설득과 과감한 선동, 스펙터클하고 상상으로 가득한 낭만의 음유 시가다.


팀의 지휘자 최정훈은 커리어 초기부터 대작(大作)에의 열정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선명한 스토리라인을 갖춘 앨범, 화려한 코러스와 오케스트라 세션을 더한 큰 부피의 소리, 웅장한 바로크 팝부터 록 오페라까지 ‘거대하다’는 단어에 적용할 수 있는 장르를 탐구했고 또 실험했다. 청춘들의 좌충우돌 아지트를 선포한 <Monkey Hotel>에는 인트로와 피날레 트랙이 확실한 기승전결 형식미를 의도했고, <전설>은 웅장한 단어 아래 레트로의 문법을 빌려 집필한 희로애락 굴곡진 성장통의 청춘 단편선이었다.    


잔나비[JANNABI] - 3집 '환상의 나라' Behind Footage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이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과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의 히트로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한 후 밴드는 드디어 오랜 이상향 <환상의 나라>를 펼쳐 보인다. 제목을 풀어보면 <환상의 나라: 지오르보 대장과 구닥다리 영웅들>이다.


관현악단의 장엄한 연주는 근래 한국 대중음악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휘황찬란하고, 꿈결 같은 문학적 표현의 노랫말은 청춘의 한 페이지를 추억하며 일탈의 깃발을 들어 올리는 한 편의 문학에 가까워졌다. 각 수록곡은 앨범 단위 감상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두 가지 테마의 곡을 혼합하고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 극적인 템포 변화(‘로맨스의 왕’)와 새로운 분위기를 환기하는 인터루드 ‘소년 클레이 피전’, ‘블루버드, 스프레드 유어 윙스!’를 삽입하는 등 변화무쌍하다.


곡 하나하나 간단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신나는 잠’에서도 선보인 바 있던 캣 스티븐스(Cat Stevens) 풍에 클라투(Klaatu)의 터치를 가미한 ‘용맹한 발걸음이여’에도 풍성한 스트링 세션과 겹겹의 코러스가 더해지며 고전 음악 편곡이 들어간다. 간결한 피아노 연주로 출발하는 4분의 3박자 우아한 춤곡 ‘고백극장’은 거듭 소리의 벽을 쌓으며 부피를 더해가다 아날로그 신스 연주와 퍼커션 연주로 마무리된다.


비틀즈를 직접 호명하는 ‘비틀 파워!’가 의도하듯 거장과 대작으로부터의 영향도 투명하게 공개한다.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에서 들려주는 기타 톤과 리듬은 퀸(Queen)의 ‘Killer Queen’을 연상케 하며 ‘밤의 공원’ 속 대규모 합창을 향해 질주하는 기타 연주와 신스 리프의 ‘밤의 공원’은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ectric Light Orchestra), 2000년대 그린 데이(Green Day)의 흔적이다.


[MV] JANNABI(잔나비) _ I Know Where The Rainbow has Fallen(외딴섬 로맨틱)


차분하고 간결했던 <전설>과 <잔나비 소곡집 I>을 고려하면 <환상의 나라>는 ‘로맨스의 왕’ 가사처럼 작위적으로 여겨질 부분도 있다. 전작을 기억하는 팬이나 싱글 단위 감상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 인공 공중정원은 겹겹이 쌓인 소리 아래 단단하고 명징한 최정훈의 멜로디, 그리고 유려한 진행을 통해 상상의 하늘 위를 두둥실 떠다닌다. 중요한 점은 이 부유하는 세계가 유유히 사라지는 대신 감정의 바다 위로 강하게 낙하한다는 것이다. 거대하게 일어나는 감동의 물기둥과 파도가 우리를 흠뻑 적시고야 만다.   

 

이 순간이 바로 ‘외딴섬 로맨틱’과 이어지는 후반부 진행이다. 앞서 타이틀 곡들이 좋은 싱글 그 자체에 집중했다면 이 노래는 흐름 상으로도 앨범의 한가운데 존재한다. 꿈과 열정, 희망과 도전의 젊음을 강조하고 펼쳐내는 앨범의 메인 싱글이기에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 ‘마주보던 그대로 뒷걸음치면서 서로의 안녕을 보아요’(‘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등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나 미련 대신 밝은 내일과 미래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뗀다.


재미있게도 ‘굿바이 환상의 나라’를 통해 지난날과 작별하며 현실로 돌아온 잔나비의 마지막 노래는 ‘컴백홈’이다. 펀(.fun)의 ‘Carry On’이 연상되는 이 곡에서 밴드는 ‘우린 돌아갈 거야 / 이젠 늦지 않으리’라며 힘차게 청춘과 낭만으로의 귀환을 외치는데, 앞서 인터루드 ‘굿바이 환상의 나라’에서 ‘… 그래도 오늘 밤은 집에 가야겠어’라 힘없이 읊조린 것과 정 반대로 단어를 활용한다. <환상의 나라>가 가상의 이야기, 돌아갈 수 없는 젊음의 한 때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이 판타지와 희망 노래가 누군가의 가슴속 깊이 들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영원할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는 곡이다. 순탄치 않았던 일련의 사건을 딛고 일어난 밴드의 자전적인 이야기, 극복의 서사가 마침내 완성된다.    


dreams, books, power and walls (꿈과 책과 힘과 벽)


한 때 우리는 모두 환상의 나라에 살았다. <전설>과 영웅담 속의 주인공이 되어 드넓은 상상을 펼치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낭만적인 모험담을 시와 노래로 지어 부르던 세상. 그러나 <전설>을 마무리하는 ‘꿈과 책과 힘과 벽’의 노랫말처럼, 어느 날 ‘하루하루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쯤 우리는 기억의 깊은 어딘가의 서랍 속에 반짝거리는 청춘의 여권을 반납한다. 그리고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하며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조금씩 닮아야 할’ 어른이 된다.


<환상의 나라>를 노래하는 최정훈 역시 어른이 되었다.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부르던 청년은 (‘용맹한 발걸음이여’) 현실에 투항하는 친구들을 애도하다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 ’이쯤에선 불러볼 줄 알았지’(‘누구를 위한 노래였던가’)라 좌절한다. 하지만 깊이 간직한 소중한 감정이 ‘밤의 공원’에서 되살아나는 순간 다시금 ‘외딴섬 로맨틱’이 펼쳐지고, 낭만 가득한 파랑새는 날개를 펼치며(‘블루버드, 스프레드 유어 윙스!’) 고단한 삶 속에서도(‘굿바이 환상의 나라’)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인다.


마음껏 자신을 풀어헤쳤던 몽키 호텔에서 걸어 나와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전설이 되고자 했던 밴드는 찬란한 무대와 함께 우리의 곁으로 돌아왔다. 남루하고 촌스러울지라도 드높은 이상과 영웅담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할 지니. 쇼는 계속되어야 하고(The Show Must Go On), 잔나비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쇼맨이 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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