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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례 Dec 28. 2023

명란젓

명란젓은 알갱이가 톡톡 씹히는 게 맛이 묘하다.

엄니 따라 장에 가면 이유 없이 좋았다. 

추억 같은 장날이 우리 동네에도 선다. 금요일마다 서는 금요장이다. 웅성웅성 북적대는 장터 풍경이 좋다. 언제나 남자는 웃는 낯으로 호객한다. 

"엄니, 요것 좀 잡사봐유" 

풉! 내가 쓰던 호칭이다. 젓갈 부부의 정감 있는 말투에서 모여드는 것일까. 엄니들이 발걸음을 모으고 갖가지 젓갈 맛을 본다. 남자는 푸지게 퍼 담고 여자는 상냥하게 계산한다. 곰살궂기가 그지없다. 무르익어가는 부부의 노점이 활기차다. 유난히도 붐비는 곳이 궁금하여 비집고 구경하는 이들도 있다. 


하고많은 젓갈 중에 나는 유독 명란젓에 눈길이 간다. 명란젓은 알갱이가 톡톡 씹히는 게 맛이 묘하다. 영양이 풍부하고 면역력이 탁월하여 몸에 좋고 하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명란젓을 보거나 먹을 때면 모진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아서다. 젊은 날 생활고로 가사도우미 일을 잠시 할 때였다. 눈치 없이 맛보려다 자존심 짓밟는 소리를 들었다. 파출부 주제에 언감생심 가당찮은 소리였다. 창피하고 모욕적이었다. 지금처럼 복지제도가 없었던 시절, 모자가정 가장의 설움이었다. 명란젓이 강한 엄마로 만들었다. 명란 알갱이 터지는 소리가 가슴에 두고두고 남았다. 젓갈처럼 굳세게 마음 졸이며 살았다. 


자식들이 장성하고 홀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허허로운 바람 같다. 원치 않게 마음에 선홍빛으로 남았던 굴욕이 무에 그리 서러워 지우지 못하는가. 이젠 그만 잊어야 한다. 누구를 탓하랴. 가난이 빚어낸 것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명란젓을 보면 외면하고 싶을 테지만 보란 듯이 떨어지지 않게 비치해 놓는다. 몸이 피곤하고 입맛이 없을 때 입맛 돋우는 데는 그만이거든. 명란젓 말고는 먹을 게 없는 것인지, 입이 까끌까끌할 때 물 말은 쌀밥에 얹어 먹으면 목울대로 넘어가는 게 부드럽다. 


노을 지는 세월 앞에 당면하고 보니 별 걸 다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부끄럽고 창피했던 과거를 꺼내놓다니, 그보다 더한 것도 숨기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다니, 그러고 보니 많이 살았다. 이만큼 살았으니 죄다 꺼내어 추려내는 정리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언젠가 본향으로 떠날 때는 영혼이 가벼워야 발걸음도 가벼워질 테니까. 나머지 삶은 그저 좋은 생각만 하면서 행복하게 흔들려야 한다. 마음 편한 것만큼 더 좋은 게 어디 있으랴. 젓갈 부부처럼 둥글게 웃으면서 깊은 정 나누며 아름다워져야 한다. 좋잖은 기억들은 강물에 수제비 뜨듯 멀리 던져 버리면서. 하면 어찌하여 최근 기억은 쉬 잊으면서도 그토록 오래전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기억일랑 은 더러 잊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마음이 소심해서인지 마치 치매 기억회로처럼 흑색 주파수가 뇌리에서 감돈다.


치매로 돌아가신 엄니도 젓갈을 무척 좋아하셨다. 엄니 생각에 머물 땐 당최 늦도록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날이면 날마다 코로나19로 불안해서도 그렇거니와 늙어짐의 징조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백 삼세 엄니만큼 살까도 겁난다. 백세시대라지만 건강치 못한 몸으로 장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일이던가. 순리대로 살다 떠나는 것이 세상 이치이거늘. 미리부터 겁낼 필요는 없다. 하나 부지불식간에 걸려드는 치매가 염려되는 것일까. 명란젓에 밥을 먹고 있노라면 너만 먹느냐고 눈을 치뜨고 바라보는 것 같은 엄니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맞은편에 수저 한 벌을 다소곳이 놓는다. 늙은 딸을 보며 아기처럼 맛나다고 하는 것만 같다. 현실의 눈은 감을 수 있어도 기억의 눈은 감을 수 없다고 했던가. 오래된 명란젓 기억만큼이나 엄니의 치매 기억도 떠나보내지 못한다.


오랜 세월 기구한 인생을 닮은 모녀는 서로 떨어질 수 없었다. 먼저 떠나가면 안 되는 절대적 관계였다. 그래서였을까. 치매는 당신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하지 않기 위한 딸에게 보이는 일종의 경고 같았다. 병치레로 엔간히 어미를 애태우던 딸이 정신 차려 건강 챙기라고 남겨준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힘들었던 기억이 아프면서도 생각의 생각을 이어지게 만든다.


며느리가 택배를 보낸다는 전갈을 받았다. 무색소 명란젓이다. 고마운 거 같으니라고. 시어미의 명란젓 비밀을 알고 있음인가. 그러잖아도 떨어질 때가 되어 가는데, 슬그머니 눈웃음 지어진다. 색다른 명란젓만큼이나 며느리의 깊은 정에 먹을 때마다 밥맛이 돋아날 것 같다.


선홍빛 알갱이

알알이 박혀 있는 명란


명태는 물살 헤쳐 가는 동안

윤슬을 폭로하지 않았다


다만, 혀끝이 흔들렸을 뿐


짓밟힌 자존심, 가난의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 몽환으로 남아 윙윙거린다


굴욕적인 말 폭탄은

가슴팍에 쟁여 놓았다


그 무거운 기억회로를

바다는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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