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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례 Jan 03. 2024

사고

사고(事故)로 인하여서 또 다른 사고(思考)에 빠졌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십 계단을 내리 달리다 엎어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소동을 피웠다. 

뭐에 홀린 것만 같다. 그 후로 전신 충격으로 인해 슬럼프에 빠진 지 한 달 지경. 시간은 배려 없이 흘러 뱃속까지 얼먹었는지 내과 치료도 길어졌다. 혹여 내장에 문제가 발생한 건 아닌가 싶어 위와 대장내시경 검사를 요청했다. 마침 검진 대상 해이어서 자연 종합검진으로 이어졌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난데없이 유방암 의심 증상이란 말까지 듣게 된다. 머리에 총 맞은 기분이다. 예전에 혹 떼어낸 자리에서 발생한 것인지 가족력 때문인지, 대개 암은 건강검진 때 발견된다는데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받아 든 시디(CD)와 소견서를 들고 대학병원 협력 센터로 가야 할 판이다. 묘한 기분이 든다. 쓴웃음이 번진다. 물컹한 물체를 쥔 느낌이다. 길을 걷다 연거푸 뒤돌아보는 심정이다. 힘없이 싱크대 찬장을 열어본다. 옷장을 열어본다. 죄다 한물간 구닥다리다. 가재도구들도 노인네 삭신처럼 노후된 것 들뿐이다. 아까운 것도 미련도 후회도 없다. 죽음을 생각하면 단순해지는지, 암 걸린 그녀가 옷장 정리하던 기억이 어른거린다. 

‘어떤 것에든 집착은 말자’

가 내 소신이다. 오직 꿈이 있다면 그저 들에 피어나는 들꽃처럼 살고 싶었다. 작은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면 그만이다. 의외로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서서히 정리할 때가 온 것인 양 밤새 수많은 생각들이 들랑거렸다.


대학병원은 언제나 붐빈다. 유방에 관련된 외과도 마찬가지다.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CD 판독에는 한쪽이 접혀 다시 찍어야 한단다. 건강검진 했던 병원에선 접힌 사실을 몰랐을까, 의아했다. 잘못된 사진으로 발생하는 비용보다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가 더 궁금하여 절차를 밟고 있다가 초음파검사에 들어갔다. 

"괜찮습니다." 

혹을 떼어냈던 년도 차트를 보면서 암 의심 뉘앙스를 부연 설명으로 해 준다. 괜찮다니 개운하기는 하다만 병원을, 의사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머문다. 예전에 신장염을 장질부사로 오진하여 병을 키웠던 생각, 간밤에 암에 대한 가상과 가정의 미래에 대한 상념을 떠올리면 그저 어이가 없다. 괜찮다는 말에 다행이긴 한데 8개월 후에 정밀검사를 해 보자는 건 또 뭘까. 암일 가능성을 전제로 한 말 같기도 하여 내 머릿속에서는 애매모호한 기류가 감돈다.


이토록 생각지도 않았던 사고(事故)를 겪고, 의사의 진단으로 인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복잡한 사고(思考)에 직면하고 보니 필시 신의 경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마와 입술 봉합술로 전신통증 정도로만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만약에 뇌진탕이나 치아 손상, 골절이 있었다면 어쩔 뻔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직 명이 더 남았나 보다. 갈 때 가더라도 한 번 더 정신 차려서 그저 감사하며 살라는 업보인 건만은 틀림없다.


아이가 클 때는 호되게 앓는다더니 내가 지금 그런 상황이다. 설령 암으로 판정이 난다고 해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마흔아홉에 위암으로 떠나간 언니에게 비하면 많이 살았지 뭐. 이만하면 억울할 것도 서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편안하게 유언장도 구비해 놨으니 그저 운명이려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사는 동안 값없이 받은 것이 많았으니 그 어떤 고통이 주어진다고 해도 수행하는 마음으로 고요해져야 한다. 살면서 이런저런 벽에 부딪히는 게 인생살이 아니던가.


건강검진에서 암이 의심된다는 얘기를 멀리 사는 자식들에게 알렸다면 근심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 나중에 어떨망정 나는 의지하는 것도 지배받는 것도 싫어하는 성정이어서 웬만한 건 내색하지 않는다. 간격을 두고 자란 나무가 튼실하듯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간에 존중하되 적당한 거리 유지는 건강한 삶이다. 나이 듦은 자연현상이기에 흥분도 긴장도 내려놔야 한다. 잠시 죽음 준비 예행연습이라도 한 기분이다.


나이 들면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수평적 관계로 이루어지는 벗이 좋다. 전신 통증으로 혼자 힘들어할 때 친구의 따듯한 손길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대지에 생기가 샘솟는다. 마음에 깊은 소리가 들린다. 피고 지는 봄꽃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다가온다. 정신 맑게 움직이는 노후는 아름다운 노을이다. 아픈 만큼 세상도 더 커 보인다


너 

지은이: 양 순 례


가까운 에너지다

진실한 눈동자다


언제나 한결같이

정겨운 스팩트럼


이 세상 다 준다 해도

너만 할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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