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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동하는독서 Nov 15. 2023

공개된 역사, 지켜야 할 역사

어느 날부터 아내가 자꾸 나를 보고 웃는 느낌을 받았다. 별일 아니라고는 하는데 사람에게는 육감이란 게 있지 않은가? 필시 뭔가 내게 불리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느낌만 있을 뿐 정확한 근거가 보이지 않아 불안하기만 했다. 물어봐야 더 불리해질 것 같아 더 이상 캐지 않았다. 하지만 그 미세하게 입술을 추켜올리는 웃음은 은근히 기분 나쁠 정도로 등꼴이 오싹해졌다. 의도적으로 나만 보면 일부러 보여주는 저 웃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명 나를 궁금하게 하려고 하는 수작인데... 내가 의도적으로 궁금해하지 않으니 더 자주 무언의 메시지를 던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작정하고 물었다.

“왜 웃어? 무슨 일 있지?”

“아니야. 아무 일 없다니까.”

“그런데 왜 자꾸 웃는 거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슬아슬하게 고비에서 멈추는 아내. 결국 자기도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운을 띄웠다. 

“자기야. 예전에 말이야… 아니다.”

“뭐야? 뭔데? 이상하네.”

“음… 옛날에 만났던 그 여자 헤어지고 많이 슬펐어?”

아뿔싸! 눈앞이 노래지는 듯한 이 느낌. 뒤통수가 싸늘해졌다. 아내가 알 수 없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일기장을 봤다는 말이다. 다짜고짜 물었다. 

“언제부터 봤어?”

"며칠 전부터 조금씩. 밤마다 그거 보니라 잠도 잘 못 잤어.”

예민하게 반응하면 더 이상할 거 같아서 차분히 대처했다. 큰 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물었다. 

“남의 일기를 왜 보는 거야?”

“일기장을 그렇게 허투루 두니까 그렇지.”


아내는 책장에서 우연히 일기장 하나를 발견했다. 재미있게 읽고 보니 어딘가 다른 일기장도 있을 거란 추측이 들었다. 책장을 모두 뒤져 몇 권의 일기를 찾아냈다. 일기를 왜 그리 쉽게 내버려 두었나 싶겠지만, 아내는 책장을 뒤지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심이 화근이 되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평범하게 여기저기 꽂아두면 오히려 신경이 덜 갈러라 착각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생각했다. 꼭꼭 숨겨두었어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일기를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노트에도 쓰고, 공책에도 쓰고, 문구점 일기장에도 썼다. 보통은 스프링 노트에 쓴 것이 많아서 모아놓은 노트들과 특별히 구분되지 않았을 테다, 문구점 일기장이 눈에 띄었으리라. 그리고는 스프링노트를 다 뒤져 일기장을 찾았겠지. 이런 불상사를 예측 못한 건 아니지만, 20년 넘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 생각을 하다니. 익숙해지면 이런 사달이 난다. 나도 오래되어서 어떤 내용이 있을지 추측이 되지는 않지만, 어디 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겠는가? 


최근에는 에버노트에 가끔 쓰지만 PC에 특별히 로그인 설정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별로 숨길 것도 없는데 중간에 비밀번호 치는 것도 번거로웠다. 결국 일기란 것도 언젠가는 세상에 나올 글이란 생각도 한다. 절대 비밀이란 게 있을 리 없다. 그런 게 있으려면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수밖에. 노트에 남겼다는 것은 언젠가 들통이 날거란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마음에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아내는 그 이후로도 몇 번씩 일기장에 적힌 그녀들에 관해 물어왔다. 자꾸 들으니 웃어넘길 정도는 되었지만, 처음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난감했다. 등짝에 털이 쭈삣 서고, 얼굴의 핏기가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모두 공개되고 나서 차라리 편한 면도 있다. 아니 반대로 내 역사를 누군가 읽어준 것에 대해 다행이란 마음도 든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누군가는 읽어줄 글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누군가 읽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기를 쓴다. 혼자 읽을 글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개인 희로애락이  누군가에게 꼭 읽힐 필요는 없겠지만, 나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들이 역사가 될 수도 있겠다. 폐기하고 가지 않는 한 우리 아이들이 언젠가 읽지 않겠는가? 며느리나 손자가 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제대로 살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기도 한다. 그때는 이 글이 나의 역사가 되겠지. 이왕 쓰는 일기나 글이라면 언행일치로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다시 일기를 펼쳐든다. 추억으로 떠나본다. 


첫 일기장에 친구의 누나 때문에 당황했던 고등학교 1학년의 내가 보인다.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마주친 대학생 누나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춘기 소년. 큰길에 마주쳤지만, 안대를 하고 지나가는 누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아는 척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을 테다. 몇 번을 마주치다 인사를 나누었던 어색함이 지금도 떠오른다. 나이차가 4살이 넘었지만 미대생 누나는 여드름 나던 소년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올림픽이 한창이던 시절 거리는 활기찼고, 외국 영화와 음악이 넘쳐났다. 친구들과 단연 최고로 꼽는 청소년 문화는 영화였다. 영화하면 홍콩이 단연 으뜸인 시대였다. 비디오 플레이가 있는 친구집은 모임장소로 최고였고, 비디오 대여점 사장님과도 친했다. 그래도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맛이 아니던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영등포였다. 영보극장에서 본 다이하드, 명화극장에서 본 영웅본색, 연흥극장에서 본 천녀유혼이 생각난다. 그 외에도 경원극장, 남도 극장이 영등포 시장 쪽에서 먹자골목까지 이어졌다. 


94번 버스를 타고 지금은 핫 플레이스가 된 신도림을 지나 영등포로 나갔다. 신세계 백화점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었고 근처 뚜리바란 분식을 애용했다. 뮤직 비디오가 한창이던 시절이라 메탈리카를 보기 위해 음악다방도 자주 찾았다. 그만큼 영등포는 우리 동네에서 절대 접할 수 없는 첨단의 공간을 제공했다. 골목마다 이어지는 먹거리들이 즐비한 곳. 학생이라고 따로 차별해서 받지도 않던 시절이었고, 교복 자율화는 학생과 일반인을 구별하지 못하게 했다. 


일기장을 펼쳐 보며 옛 추억에 한참을 빠져들었다. 그때 골목 구석구석이 기억난다. 그때 같이 다녔던 친구들도 얼굴도 떠오른다. 그때 핸드폰이란 게 있었으면 지금쯤 사진을 보며 추억여행에 날밤 새는 줄도 몰랐을 테다. 그러고 싶다. 기억이란 건 점점 퇴색되고, 그때의 야릇했던 감정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너무나 아쉽게 일기장을 넘긴다. 찬란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위대함은 이제 점차 사라져 간다. 일기장 덕분에 퇴색된 기억 위로 선명한 획을 더한다. 

아들도 내 일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기 나이 때 아빠의 고뇌와 생각, 추억을 보면 어떤 느낌을 받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래서 10대에 내가 했던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아빠가 해봤으니 너는 안 해도 된다.. 뭐 이런 식이다. 내가 해봤으니 해도 된다는 것은 잔소리 같다. 아빠가 했다고 아들도 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일기가 오픈되는 날은 지옥 같았는데, 막상 공개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비밀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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