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으로 기억합니다. 국어 선생님께서 급한 사정이 생겨 다른 학년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임시로 들어오셨습니다. 갑자기 40대 선생님에서 20대 후반의 젊은 여선생님으로 바뀌자 교실은 술렁였습니다. 남학교에서 20대 여선생님은 존재만으로도 인기가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가고도 남겠죠. 쉬는 시간부터 수업 분위기는 상당히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갑자기 들어온 터라 진도를 나가기도 애매하시다며서 문학 이야기를 제안하셨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린 왕자>와 <수레바퀴 밑> 등 문학에 대한 이야기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중간에 몇가지 질문을 하고 우리가 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너희들 중에 죄와벌 읽어본 사람 있어? 저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 있어?"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었고 잠시 적막이 흘렀습니다.
그때 내 자리는 뒤쪽 문 가까이 있었고 선생님은 앞의 창가 쪽 대각선이라 가장 멀었습니다. 절대로 들리지 않을 거라 확식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의 얼굴이 환하게 변하며
"누구야? 누가 말했어?"
나는 깜짝 놀랐지만, 모른척 가만히 있었습니다. 친구가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야, 너잖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었습니다.
"뭐라고 했지? 정답이 나온 거 같은데?"
자신 없는 투로 다시 작은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도스토 예프스키요..."
"와..이반에도 문학을 사랑하는 학생이 있구나! 정답이야. 평소에 책을 많이 읽나 보구나. 그 저자를 말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갑자기 우쭐해졌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내용에 관해서는 더이상 묻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들은 대단하다며 엄지척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날 나는 갑자기 문학소년이 되었습니다. 이쁜 여선생님에게 인정 받은 소년은 문학작품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로 합니다. 아니 들여놓아야 했습니다. 정체성이 변하는 순간은 생각지도 않은 인정에서 찾아오기도 하니까요.
사실 나는 <죄와벌>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알까요? 당시 우리 집에는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60여권의 <세계문학전집>(?)이 있었습니다. 오른쪽으로 넘기는 책으로 세로 읽기 책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책을 보기 드물지만 예전에는 그런 책이 많았습니다. 학생들도 읽기 쉽도록 주니어용이었지만, 성인들에게도 좋았을 전집입니다. 방에 서면 눈에 그 책이 들어옵니다. 적당히 한자와 섞인 제목을 봅니다. 한얀 바탕에 씌여진 제목과 저자는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졌습니다. 덕분에 웬만한 책은 저자가 누구인지 입에서 금방 나왔습니다.
예전에는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은 곳을 다녀오면 휘장을 기념품으로 구매해오곤 했습니다. 산의 그림이나 등반코스등이 그려진 국기 모양의 휘장이었습니다. 그 안에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시를 매일 보다시피 하니까 저절로 외워졌습니다. 푸시킨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시가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으니, 멋지다고 추켜 세우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그 <죄와벌> 사건 이후로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시작했습니다. 아는 척을 했으니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물어보면 적당히 대답이라도 해야할 것은 압박감이라고 해야할까요? <부활>, <대지>, <제인 에어>, <춘희>, <어린 왕자>, <안나 카레니나>,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등을 읽어갔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책 읽기의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특히 그때 읽었던 펄퍽의 <대지>는 중학생에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감동은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춘희>는 가희 충격적이라서 중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도 물어보기 힘든 내용이라 누가 줄거리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문학작품에 관해 대화를 나눌 상대는 없었으니, 돌이켜보면 참 아쉬운 중학시절입니다.
세익스피어 책은 줄거리가 이렇게나 치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신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때는 이런 고전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중학교 이후로 고전문학은 거의 읽은 적이 없지만 나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험들입니다.
지금은 이사 다니며 없어진 책이지만 중학교 때의 감성을 채워준 고마운 전집입니다. 그래서 환경은 중요한가 봅니다. 아마 그 전집이 집에 없었다면 읽어볼 일도 없었겠죠.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환경을 먼저 만들어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집에 책이 많다면 읽을 확률은 높아지겠죠. 부모가 열심히 하는 일은 자녀도 따라 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소장용 책을 종이책으로 구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책장에 꽂혀있으면 언젠가는 아이들도 읽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어쩌면 제목만 아는 것이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