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후반 때는 공부보다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한참 홍콩 르와르에 빠졌습니다. 친구들과 <영웅 본색>을 보러 종로와 영등포 극장을 많이 찾아 다녔습니다. 홍콩에서 나온 영화라면 개봉작, 비디오 대여를 가리지 않고 봤던 시기입니다. 친구들과 모여 <천녀유혼>비디오 테잎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릅니다. 비디오플레이어가 있는 집은 임시 극장이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들어오지 않는 집이면 모여서 밤새도록 영화를 봤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음악이 좋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돈이 생기면 음악 테잎을 샀고, LP가 있는 집에 모여 음악을 들었습니다. 형님들이 들었던 60년대부터 80년대 팝을 들으며 있지도 않은 추억의 팝에 빠졌습니다. 김기덕, 이종환 같은 DJ의 라디오는 팝을 제대로 듣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통기타를 독학하며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사춘기입니다. 친구들과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 음악카페를 자주 다녔습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야 그만큼의 자유를 얻을 수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음악을 신청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곡이 하나 있습니다. <I've Been Away Too Long>. 왜 이런 음악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약속하지 않고 나가도 아는 친구들이 삼삼오오 앉아 서로를 기다리기라도 한듯 대화를 이어가곤 했습니다. 밤이면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세상이 궁금했고, 졸업하면 어떤 세상일지 상상하던 10대입니다.
당시에는 대학에 관한 드라마가 청소년을 유혹하던 시기입니다. 대학만 가면 저런 낭만과 사랑이 나를 반겨주리라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던 시절입니다. 당대 최고의 연기자들은 모두 청춘 드라마 출신이었을 정도였으니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낭만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고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그 시기에는 그런 감각적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책은 <혼자 뜨는 달>입니다. 우연히 사촌누나 집에 들렀다가 제목이 신기해서 읽었습니다. 차마 놓지 못해 결국은 시리즈를 모두 구매했습니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빌려주며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주인공이 책의 저자라고 착각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강렬했는지 지금도 느낌이 살아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그 정도의 임팩트가 있는 책이라면 대박책이 될텐데요. 순수했던 남자 주인공이 연상의 누나를 사랑하며 벌어지는 꿈같은 스토리들은 10대의 밤을 채우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춘기 고등학생은 밤새워 그 책을 보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좀 진중한 책을 읽었습니다. 가족이 구매했던 <삼국지>, <초한지>, <손자병법>, <장길산> 같은 책을 접했습니다. 남자라면 <삼국지>를 10번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열심히 읽었습니다. 세상에 한번 태어난 인생, 호연지기를 키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용이 뒤죽박죽되어서 연결이 되지 않아도 한 장면 한 장면이 좋았습니다. 이때 중국 고전 소설은 홍콩 르와르와 이어져 중국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물론 당시는 중국 수교 전이기 때문에 중국보다는 홍콩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무협지도 엄청 유행했습니다. 만화방에는 무협지 소설도 만만치 않게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만화방은 나와 별로 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소설 <영웅문>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지나며 읽었던 유일한 무협지입니다. 이 책도 푹 빠져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든 책입니다. 허무맹랑하지만 글을 쓴 작가의 대단함을 느끼며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무협지를 거의 읽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생일에 친구가 <성자가 된 청소부>흘 선물했습니다. 남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책을 선물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삶의 의미들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나 봅니다. 칼릴 지브란의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란 책도 선물 받았습니다. 친구들끼리 신진호 시인의 책을 나누어 보기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까 문학보다는 당시 유행하던 책들에 편승했나 봅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시를 하나 올려볼까 합니다.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 신진호 -
그 짧은 시간에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서둘러 술잔을 비웠다.
알지 못하리라
이런 가슴 아픔을
친구가 돌아왔을 때
나는 웃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시에는 <접시꽃 당신>처럼 시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연습장에는 <홀로서기>라는 시가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연습장을 고를 때 <홀로서기>시리즈를 보고 선택할 정도였으니까요. 지나고 보니 시집도, 책도 좋아했던 시절이었네요. 예민하고 감수성 넘치던 시기에 대해서 쓰다 보니 감성이 넘쳐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룹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재미는 독서 시절입니다. 지금은 좋아하는 책이라도 밤새워 읽지 않습니다. 그때는 낭만이 넘쳐났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제게는 소중한 기억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