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필로 만난 인연

by 행동하는독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떨어진 성적을 만회하지 않으면 목표를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을 굳게 먹고 학원에서 하루 종일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뒤에 앉아서는 칠판이 아득히 멀어 필기가 쉽지 않았다. 안경도 하나 맞추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른쪽 앞에 앉은 사람 노트를 보니 나름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글씨가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세상에 이런 글씨를 쓰는 사람이 있구나 싶다는 생각을 하며, 어깨너머로 아무리 보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초등 때부터 글씨 잘 쓰기로 칭찬을 많이 받던 나로서는 도무지 글씨 못쓰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저런 글씨는 자기도 못 알아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도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말이 튀어나갔다.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네."


그날은 어찌어찌해서 전부는 아니지만 대강 필기를 할 수는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휴식시간에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벤치에 앉아 수업 내용을 살펴보는데 누군가 옆에 다가왔다.

“저~ 옆에 앉아도 될까요?”

“아. 예. 그러세요.”

그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커피를 마셨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집이 강원도입니다. 원주에요."

"아. 예.. 그러시군요."

얼떨결에 대답을 하긴 했지만, 갑자기 뜬금없는 자기소개에 당황했다.

"제 글씨가 그렇게 악필이었나요?"

나는 깜짝 놀랐다. 생각할 겨를 도 없이 사과했다.

"들으셨어요? 죄송합니다. 글씨가 잘 안 보여서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서로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다. 나이는 동갑인 친구였는데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고 했다. 혼자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친구가 없어 몹시도 심심했나 보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라는 칼리 지브란의 책을 선물해 주었다. 편지 형식과 시로 기억되는데... 사실 바쁜 공부 때문에 제대로 읽어보지는 않았다. 덕분에 새로운 세계를 접할 기회를 가진 듯하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예술적 감성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다. 학원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바깥에 있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특히 그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집중력이 계속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생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 친구로부터 편지도 받았고 몇 가지 시집도 추가적으로 선물 받았다. 감성이 충만한 걸까? 친구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는 것일까?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부담감이 마음을 억누르기 시작할 무렵 심각하게 결정해야만 했다. 내가 학원에 다니는 목적을 분명히 하기로 했다. 그리고 학원을 그만두고 독학을 시작했다.

그 친구는 집까지 나를 찾아왔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편지를 두고 가기도 했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멀어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와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일 년 정도 지나서 그와 연락이 닿았다. 사당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계속 공부하고 있던 그 친구를 잠시 만났다. 시험에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그를 응원해 주었다. 자주 연락하기로 했지만 더 이상의 만남은 없었다. 원주를 지날 때면 그 친구가 머리를 스쳐간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친구의 진심이 무엇인지?

내가 예민한 것인지?

그래도 생각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다음주 원주에 가는데 그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