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난 것은 10년 전이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가슴 설렘은 잊을 수가 없다. 하얀 얼굴, 검고 긴 생머리, 짙은 눈썹에 화장기 하나 없는 피부. 어느 것 하나 나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친구하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좋았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다. 같이 여행도 떠나고 힘들 때 서로를 위로했다. 그녀가 힘들어할 때 그녀를 포근히 앉아 준 적이 많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 미안했지만 그때마다 엄청난 희열감을 느끼곤 했다. 그녀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이유가 충분했다.
그녀에게 남자가 생긴 날,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단지 우리는 친구일 뿐이라고 나 스스로를 설득해도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곁에서 좋은 친구로 남아 있는 것뿐이었다. 남자와 심하게 다투고 눈물 흘리는 그녀를 보며 내 마음도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를 데리고 동해 바닷가로 달렸다. 모래사장에서 새벽 바다를 보며 그녀 옆에서 그냥 묵묵히 바다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볼에 타고 내리는 눈물을 보는 것은 가장 힘든 일중에 하나였다. 나란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남자를 찾아가 한대 때려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를 무사히 집까지 바대다 주는 것뿐이었다.
남자와 이별을 한 후에도 그녀를 나를 찾았다.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녀의 모든 눈물을 다 받아주었다. 같이 음악을 듣고 친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도 했다. 시간이 약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가 잘 극복하기를 기도했다. 그녀가 이별을 잘 극복하고 다시 웃는 얼굴로 나를 찾아왔을 때 세상을 다 얻은 듯 몹시도 기뻤다.
어느 날 친구를 만나겠다고 먼 길을 떠나는 그녀와 동행했다.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몹시도 내렸다. 서울에 거의 다 들어올 때쯤, 비는 최고의 절정에 다다랐다. 주유를 하기 위해 들어간 강남은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빗물을 해치며 힘겹게 달렸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얼마나 두려움을 숨겼는지 모른다. 시동이 꺼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집에 도착한 후 그녀는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만 남기고 들어가 버렸다. 그녀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녀가 결혼하던 날 나는 문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오늘 같은 날은 아무 내 색 없이 같이 기뻐해 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결같이 곁에 있어 줘야 한다고,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사랑을 꼭 지켜 내고 싶었다. 결혼식으로 몹시 설레어 하는 그녀와 남편이 된 그 남자를 공항까지 내색하지 않고 바래다주었다.
그녀에게 아이들이 생기고 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날은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그녀는 앞에서 뒤까지 이어지는 나의 표면을 쓸어가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떠나는 나를 보며 눈물을 보였다. 나를 잊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희망 사항으로 만 가슴속 깊이 남겨두기로 했다. 비록 지금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달리고 있지만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전에 그녀를 어디선가 딱 한 번은 마주쳤으면 좋겠다.
PS. 그녀와 맨살이 닿을 때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무척 수줍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사고로 나의 살과 뼈가 부서질 때도 그녀가 안전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도 그녀와 나누었던 음성을 블랙박스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