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대의 TV와 디지털 시대의 검색창 사이에서
유튜브에서 70년대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재생을 중지했다.
공감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같은 시대에 이어령이 글을 쓰고 있었고, 김수영의 시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TV 안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문명 같았다. 조잡하고, 얕고, 그리고 이상하게 자신만만했다.
이 괴리가 시대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전부터 꽤 오래 생각을 이어갔는데, 오늘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급기야 새벽에 일어나 개똥같은 기록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1. 계급으로서의 매체 / 70-80년대의 구조
산업화 황금기의 정보 생태계는 단순했다. 책, 신문, 라디오, TV. 이 네 개가 거의 전부였다.
그리고 이 매체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계급 구조가 있었다.
책은 진입장벽이 높았다. 서점에 가야 하고, 돈을 내야 하고,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읽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했다. 이 네 단계를 통과하는 인구는 전체의 극소수였다.
TV는 반대편에 있었다. 전원을 켜는 것이 전부다. 보겠다는 마음을 먹을 필요도 없다. 채널이 두세 개뿐이니 국민 전체가 같은 화면을 본다. 이 매체의 설계 원리는 명확하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이탈하지 않는 수준의 타깃 오디언스.
그러니까 70년대 TV가 수준이 낮은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얘기다.
TV는 의도적으로 지식 콘텐츠의 진입장벽을 허물었다. (아! 이건 텍스트 매체가 처음 나왔을 때의 전개와 매우 흡사하다. 값싼 신문이 봇물처럼 터져나오자 온갖 가십이 신문 가판대를 가득 메웠다)
2. 디지털이 메운 간극
2000년대 이후 정보의 접근 비용이 사실상 0이 되었다. 위키피디아 하나가 백과사전 수십 권을 대체했고, 유튜브가 대학 강의를 무료로 풀었고, 번역기가 언어 장벽을 부쉈다. 한국의 중학생이 MIT 강의를 볼 수 있는 시대다. 70년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정보 접근성이다.
이 과정에서 평균적인 인류의 인지 수준은 분명히 높아졌다. 환율이 뭔지, GDP가 뭔지, 양자역학이 뭔지. 과거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정보의 민주화. 여기까지는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천장을 보자.
깊이 생각하는 인구가 늘었는가. 한 텍스트를 붙들고 30분 이상 씨름하는 사람이 늘었는가. 결론을 유보하고 불확실성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 늘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줄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보 과잉이 사유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궁금하면 검색한다. 검색 결과가 답을 준다. 답을 얻었으므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순환이 반복되면 사유의 근육은 퇴화한다. 물리적으로도 신경학적으로도 그렇다.
3.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의 분리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안다는 것과 사유의 능력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70년대의 무지한 사람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2020년대의 정보 소비자는 자기가 안다고 믿는다. 검색으로 피상적 지식을 얻는 속도가 빨라졌으니까. 위키피디아 문단 하나를 읽고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느낀다. 전개와 행간이 모두 비었다. 3분짜리 유튜브 영상을 보고 철학적 입장을 갖는다.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 이것은 사유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착점이다.확신은 탐구를 멈추게 한다. 탐구가 멈추면 사유가 멈춘다.
4. 분포의 재편
정리하면 이런 그림이 된다.
70-80년대: 깊이 사유하는 극소수 vs 수동적 다수. (중간이 없다)
2000년대 이후: 깊이 사유하는 극소수 vs 피상적으로 아는 거대한 중간층 vs 정보 접근조차 없는 극소수.
넓지만 얕다. 많이 알지만 깊이 모른다. 의견은 많지만 사유는 없다. 이 늪의 특성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벽 아래에 있을 때는 올라가야 한다는 긴장이라도 있었다. 늪 안에 있으면 이미 어딘가에 와 있다는 착각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늪에서 가장 잘 자라는 것이 확증편향이다. 정보가 풍부할수록 자기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기 쉬워진다. 어떤 주장이든 검색하면 지지하는 글이 나온다. 반대 의견은 스크롤해서 넘기면 된다. 알고리듬은 이를 가속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더 보여준다. 당신이 믿는 것을 더 확인시켜준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자기 의견을 갖게 되었다고 믿지만 사실상 다른 이들의 의견이다. 그것도 요약된.
5. 매체는 사유를 조종한다.
책은 사유를 훈련시킨다.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과정을 따라가고, 반론하고, 결론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뇌의 신경회로를 구성하는 훈련이다. (뇌의 기억 과정에 대해서는 최근에 무척 대단한 이론을 발견했다. 뇌에 저장 장소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건 다음에 쓰고)
이 훈련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효과가 있다.
TV는 자극을 훈련시킨다. 짧은 장면, 빠른 전환, 감각적 호소. 사유가 아니라 반응을 요구한다. 그래서 편안하다. 그래서 효과가 없다.
스마트폰은 이것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15초짜리 영상물이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된다. 뇌가 한 가지 주제에 머무는 시간이 파멸적으로 줄어든다. 더 짧게, 더 빠르게, 더 쉽게. 이 방향에서 사유는 비용이다. 제거해야 마땅한 '죄악'이다.
6. 스케일을 확장해 보면!
생성이 우주의 근본 속성이라면, 정보의 폭발도 생성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정보가 팽창하고, 그 팽창 속에서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기존 구조가 몰락하기도 한다. 정보의 팽창이 잡음의 팽창인지 신호의 팽창인지 따지기 힘들다.
정리를 해보자! 정보량에 비례해서 대중의 사고 수준이 올라가는가?
답은 이렇다. 바닥은 올라갔고, 천장은 내려갔고, 중간이 엄청나게 두꺼워졌다. 그 중간의 이름은 '아는 것 같은 느낌'이다. 느낌은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 (그놈의 느낌적인 느낌...)
70년대 TV의 수준이 민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2020년대 댓글창은 민망하지 않은가.
무지했던 시대의 무지는 적어도 순수했다. 정보로 무장한 시대의 무지는 자기 확신으로 포장되어 있다.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는 자명하지 않을까?
책을 읽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다. 한 문장을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다. 검색 결과를 의심하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다. 정보의 총량은 폭발했지만 사유하는 인구의 비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줄었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비율이 아니다. 착각의 규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