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렇게 사라질 뿐이다.
출근길에 작가님이 원고를 보내왔다. 한글 파일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열었다. 안 열린다. 뷰어를 깔았다. 광고가 나온다. 레이아웃은 뭉개져 있다. 겨우 읽었지만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회사에 도착해서 문서를 다시 읽었다.
2020년대에 파일 하나를 읽는 데 이 정도의 불편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방송은 트렌드를 다루는 산업이다. 그런데 그 트렌드를 담는 문서가 HWP다.
한글. 관공서의 도구. 공문서처럼 한 번 찍히면 그대로 보관되는 문서에는 맞을 수 있다. 그런데 방송은 정반대다. 대본 하나가 자막이 되고, 카드뉴스 같은 소셜미디어의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 공유하고 변형하는 것이 일의 본질인 곳에서 한글은 공유와 변형에 가장 취약한 포맷이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그런데 이면을 들여다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방송은 허가제 위에 세워진 산업이다. 진입장벽이 곧 권력이었고, 그 권력은 위계를 만들었다. 느리고, 형식이 중심이 되고, 결재선이 길다. 관공서와 닮은 이유가 있다. 태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HWP는 그 닮음의 증상이다. 원인이 아니라.
HWP 파일은 데이터로서의 가치도 없다. 텍스트를 추출해서 다른 포맷으로 가공하려 해도 구조화되어 있지 않으니, 결국 사람이 손으로 다시 옮겨야 한다. 매일 수십 건의 문서가 오가는 방송 현장에서 이걸 쓰고 있다.
반면 정부의 AI 관련 조직은 회의록을 마크다운으로 전환했다. 가볍고, 구조화되어 있고, 어떤 기기에서든 바로 열린다. 출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용을 전달하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겠다는 의지다. AI 시대의 조직이 선택한 도구가 마크다운이라는 사실은, HWP에 머물러 있는 조직이 어느 시대에 속해 있는지를 역으로 보여준다.
작가들이 한글을 고집하는 이유? 관성이다. 세로쓰기, 줄간격, 들여쓰기. 수십 년간 손에 익은 편집 감각을 버리기 어렵다. 그런데 그 들여쓰기 자체가 이미 유물이다. 타자기 시대에 문단의 시작을 눈으로 구분하기 위해 만든 관습이다. 타자기의 물리적 제약은 사라진 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런데 결재문서는 여전히 타자기 시절의 형식 그대로다. 관성이란 이런 것이다. 이유가 사라진 뒤에도 형식만 남는 것.
그런데 HWP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구는 증상일 뿐이고, 병은 더 깊다.
방송 조직은 아직도 학벌을 본다. 콘텐츠 산업이라면서 사람을 볼 때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가 먼저다. 기획력, 감각, 실행력보다 간판이 앞선다. 허가제로 시작한 산업답다. 자격을 능력보다 위에 놓는 관료적 사고가 뼛속까지 박혀 있다.
그래서인지 방송인들의 정보와 상식이 의외로 느리고 얕다. 이것은 안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만 아는 사실이다. 트렌드를 다루는 사람들이 정작 세상의 변화를 늦게 감지한다. 매일 뉴스를 만들면서 자기 산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는 둔감하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구조의 필연이다. 닫힌 조직은 내부 위계에만 민감하고, 바깥 세계에는 무디어진다.
관심의 방향도 그렇다. 권력자, 정치인, 유명인. 이 범주 밖의 이야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프레임 자체가 권력 중심이다. 누가 힘을 가졌는지. 누구 편에 서야 하는지. 콘텐츠의 본질이 사람들의 삶과 감각에 닿는 것이라면, 이 조직은 콘텐츠가 아니라 권력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시청자의 일상보다 여의도의 동선에 더 예민한 조직이 대중 매체를 자처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다. 학벌을 보는 눈. 느린 감각. 권력 중심의 관심. 그리고 HWP. 전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이다.
개인의 습관이 조직의 관성과 맞물리면, 그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태계가 된다. 생태계는 설득으로 바뀌지 않는다. 정서를 갑자기 바꿀 수는 없다. 어떤 산업이든 나름의 정서와 관성이 있고, 그 틀을 안에서부터 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레거시는 혁신하지 않는다. 시대와 함께 사라질 뿐이다.
도구는 조직의 무의식이다. 무엇을 쓰느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드러낸다. HWP를 쓰는 방송국은, 자신이 이미 관공서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