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딸이 차린 밥상 005

야매 유산슬밥

by 반바


지갑에 여유 없고 마음의 여유는 더 없던 자취생 시절. 마트에 들어가 채소코너로 직행해도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손을 뻗었다가도 멈칫. 고개를 갸웃하며. 마치 값 비싼 금은보화를 딱 하나만 고를 수 있는 사람처럼 고민했다.


이건 음식물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오겠는데.

1인가구가 소진하기 너무 많은 양인걸.

얼씨구? 채소가 고기보다 비싸네.


그럼 결국에는 세 봉지 묶음에 천 원 하는 팽이버섯과 스티로폼 팩에 들어 있는 느타리버섯을 장바구니에 넣는 거다.


1.jpg


거의 대부분의 식재료를 밭에서 조달해 먹는 산골 생활. 어쩐지 버섯도 채집해서 먹을 것 같은 이곳에서 버섯은 의외로 귀한 식재료다. 비만 오면 솟아나는 게 버섯이지만 아무 거나 따먹었다가는 황천길 직행이다. 자취생 시절을 추억하며 안전한 마트표 버섯을 집어 들었다.


오늘 메뉴는 유산슬밥이다. 고기도 없고 죽순도 없지만 모양은 그럴싸하게! 이름이 거창해서 그렇지 굴소스와 전분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


2.jpg


초봄에도 조달가능한 몇 안 되는 채소 대파.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푸릇해진 대파는 유독 더 달게 느껴진다. 이날은 남은 미나리가 있어서 미나리로 향을 더 했다. 유산슬에 미나리라... 실험적 도전을 즐기는 딸래미다.


3.jpg


김치냉장고에 저장해 둔 마늘이다. 어두운 냉장고에 들어 있었는데도 어떻게 봄을 아는 거니? 속에 푸릇한 싹을 띄워 올리는 걸 보면 자연은 참말로 신비하다.



4.jpg


냄비를 달구고 마늘향을 뽑은 뒤 버섯을 넣는다. 꽉 채워 넣어도 숨 죽으면 한 줌이다. 버섯이 싸서 얼마나 다행인지... 숨이 죽고 노릇하게 익으면 굴소스와 소금으로 간하고, 혹시나 고기가 빠져서 허전하다면 쇠고기 다시다도 한 작은 술 넣어준다.


5.jpg


물을 한 컵 붓고 만들어둔 전분물을 끼얹는다. 전분과 물의 비율은 1대 3이라고 배웠지만? 전분의 끈적함을 싫어하는 아빠를 고려해 1대 5로 맞춰서 넣는다.


끈적한 농도가 보이면 간을 보고 모자란 간은 소금으로 채운 후 참기름으로 마무리한다. 비건이라면 소금간만 해도 좋다.


6.jpg

아뿔싸!


대파 넣는 걸 깜빡했다.


그렇다면 생대파로 식감과 향을 살린 척해본다. 생으로 먹기에는 부담스럽게 큰 사이즈지만 중국 어딘가에서는 생대파를 그냥 먹기도 한다고 우겨보며... 따끈하고 끈적한 소스가 밥알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씹지 않아도 홀홀 넘어간다. 이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씹는데 집중해야 한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팽이버섯이 넘어간다면 폭풍사레가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냉장고에 붙어 있던 중국집 전단지. 짜장면이 2천 원 짬뽕은 3천 원 탕수육은 1만 원.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맛본 음식이었다. 그 아래로 가면 유린기 유산슬 팔보채 난자완스... 중국 무협영화의 주인공 같은 이름을 보며 무슨 맛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유린기랑 유산슬은 여자. 팔보채랑 난자완스는 남자)


음식에 성별을 붙이고 놀던 어린이는 집에서 유산슬 해 먹는 어른이 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딸이 차린 밥상 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