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딸이 차린 밥상 006

우동

by 반바

나 어릴 적 아빠가 쉬는 날은 1년에 3번. 추석, 설날, 그리고 2박 3일의 여름휴가. 그러니 1년에 고속도로 휴게소를 갈 일도 딱 세 번이 끝이었다. 어쩌다 휴게소에 들르면 급한 볼일만 보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휴게소의 별미라 불리는 알감자, 맥반석 오징어, 호두과자, 핫바, 소시지. 쇼케이스의 오렌지빛 조명 안에서 윤기를 뽐내며 유혹하는 간식거리들에 군침을 흘리며 꾸물거리면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이라면 어린애가 먹고 싶다는데 좀 사주지! 볼멘소리를 할 텐데. 차 안에 음식냄새와 부스러기를 용납할 수 없는 아빠와 극심한 차멀미를 하는 엄마의 암묵적 합의로 인해 지금도 휴게소에 가면 군것질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린 시절의 습관 형성은 이토록 무섭다.)


딸들이 성인이 되고, 엄마 아빠도 나이가 들면서 휴게소 음식에 많이 관대해졌다. (차에서 먹는 건 여전히 불편해하시지만) 그런 아빠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정말 드물게 휴게소 식당에서 사 드시는 음식이 있는데 그건 바로 우동이다.


스물세 살, 아빠의 첫 직장은 관광회사였다. 아빠의 첫 보직은 의류도매상들을 모아 서울 동대문 시장까지 인솔하는 가이드였다. 심야의 고속버스가 한참을 달리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상인들은 저마다 질 좋은 물건을 찾으러 뿔뿔이 흩어지고. 새벽 무렵까지 여유 시간이 생긴 아빠와 기사님은 조그만 스낵카에 들러 뜨끈한 우동을 사 먹곤 했다.


우동을 먹을 때마다 아빠는 스물세 살로 돌아간 듯 생생한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아빠에게 우동은 그때로 돌아가는 마법 같은 음식이 아닐까?



1.jpg


일본 식자재마트에서 우동쯔유를 샀다. 물과 쯔유를 10대 1 비율로 희석하고 조미료 맛을 가리기 위해 텃밭에서 따서 얼려둔 땡초를 분질러 넣는다. 간이 좀 세지만 우동면이 두껍고 채소를 많이 넣을 거라서 요정도 간이 딱 맞다. 시판 우동에 비해 단맛이 부족한데, 미림을 넣어 채우거나 직관적으로 설탕을 더해도 된다.


2.jpg


우동에 쑥갓이 빠지면 섭섭하다. 쑥갓을 안 먹더라도 국물에 쑥갓을 담갔다 빼야 휴게소 우동의 맛이 난다.


3.jpg


파는 송송.


4.jpg


우동면은 무조건 냉동을 추천한다. 브랜드는 아무거나 그때그때 세일하는 걸로...ㅎ

뜨거운 물에 면 사리를 넣고 면선만 살짝 풀어질 정도로 데쳐낸다. 화력에 따라 다르지만 냉동면 투하 후, 다시 끓어오르기 전에 건져낸다.


5.jpg


냉동실에서 발굴해 낸 어묵도 휴게소 스타일로 썰어준다. 삼각형이 휴게소 우동의 시그니처가 아닐까? 우동쯔유를 끓일 때 같이 넣어준다.


6.jpg


시판용 우동후레이크를 사두면 여기저기 넣기 좋다.


7.jpg

아빠 해드린다는 핑계로 엄마도 나도 먹는다.

내 것은 우동 후레이크 많이 넣는다. 처음엔 바삭바삭한 식감으로 먹고, 시간이 지나 쯔유를 잔뜩 품어 흐물흐물해지면 숟가락으로 퍼 먹는다. 입안에 고소함이 풀어진다.

8.jpg


슥슥 섞는 아빠 눈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피어오른다. 크게 집어든 면을 입안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는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고속도로까지 가지 않고도 아빠의 추억을 불러왔다. 오늘 딸래미 밥상도 성공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딸이 차린 밥상 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