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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차린 밥상 004

홍철 없는 홍철팀 생선 없는 매운탕 [어묵 순두부찌개]

by 반바

부동산 관리 회사에서 3년을 근무하고 얻은 건 우울증과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얻은 10kg의 몸무게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는 전화로 인해 뇌의 일부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얼마나 예민해졌는지, 전화벨이 울리기 전에 바뀌는 공기의 변화만으로도 전화 온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퇴사를 이야기하니 대표는 딱 3달만 인수인계를 해달라고 했다.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다. 헤어짐은 짧은 게 최고다. 퇴사를 이야기하고 2주 후 자취방을 빼 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지리산에서 출퇴근을 해야 했다. 퇴사를 위해 억지로 나서는 출근길은 상당히... 별로였다.(말을 아낀다.)


나의 예민함은 회사사람들의 묘하게 바뀐 태도를 기가 막히게 캐치했다. 지들이 도와 달래 놓고 왜 저렇게 날 대할까? 믿었던 직원인만큼 서운했을 것이다. 이해해보려 했지만 속이 답답해져 왔다. 또 뭔가를 입에 넣고 싶었다.


칼바람을 맞으며 돌아온 집. 뜨끈한 매운탕이 먹고 싶다. 마른 사람들은 계시 같은 걸 안 받는다고 하던데 나는 왜 끼니마다 먹신의 계시를 받는 걸까. 이 산골짝에 매운탕용 생선이 있을 리 만무하다. 냉동실을 뒤지니 소분해 둔 어묵이 나온다.


어묵도 생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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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용유를 두르고 고운 고춧가루, 마늘, 대파, 어묵을 길쭉하게 썰어준다. 기름에 열이 오르기 전에 모든 재료를 넣고 약불에서 서서히 볶은 후 국물맛을 극대화시키려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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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를 검지손가락 길이정도로 숭덩숭덩 썰어놓는다. 질겨지므로 가장 마지막에 넣을 거다. 매운탕 느낌 낭낭하게 내려면 쑥갓을 추천한다. 없으면 대파만 넣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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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춧기름 냄새가 향긋하게 올라오면 멸치육수를 한 컵 붓는다. 냉장고에 들어있던 차가운 멸치육수 위로 동글동글한 고추기름이 어리둥절한 듯 떠오른다. 잔뜩 화를 내다가 진짜 찬물이라도 맞은 듯하다. 자글자글하게 끓어오르면 액젓, 국간장, 맛소금으로 간하고 숟가락으로 뚝뚝 잘라낸 순두부를 넣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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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두부찌개의 꽃, 달걀도 두 알 톡 깨서 넣어준다. 하나만 넣으면 아빠가 혼자 다 먹기 때문이다. 아빠들은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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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의 가장자리가 하얗게 변하는 게 보이면 순두부찌개에서 매운탕 맛이 나게 해 줄 킥! 제피가루를 넣는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매운탕에 꼭 제피가루를 넣는데, 이걸 넣으면 독특한 향이 배어든 개운한 국물로 업그레이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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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꼬집 정도 동서남북에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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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직전에 잘라둔 미나리와 후추를 넣는다. 모든 게 다 나는 채소밭인데 어째 미나리는 귀하다.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이라서 그렇다. 봄이 오면 밭뙈기 모퉁이에 조그만 미나리깡이라도 만들어둬야 하나 싶다.


냄비째로 식탁에 올린다. 추운 겨울 뜨끈하고 매콤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넘는다. 속상했던 속이 시원하게 풀어지는 기분이다. 계란을 듬뿍 떠가는 아빠의 숟가락 위에 노른자가 두 개 올라간 건 아닌지 슬쩍 살펴본다. 재빨리 반을 뚝 떼내 엄마 밥그릇 위로 올린다.


"계란이 완전식품이잖아."


너 먹으라는 엄마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부드럽고 말캉한 순두부와 국물을 함께 떠서 입에 넣는다. 영락없는 매운탕 국물이다.


"딸내미가 참 재주도 좋아. 어째 매운탕 국물 맛이 나냐 말이야."

"그래 맞다. 재주가 많지."


생선 없는 매운탕을 끓여내는데 뭐든 못 할까. 지겨워 몸서리치던 마음을 다 잡게 되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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