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딸이 차린 밥상 003

업소용 고니는 이렇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곤이찜]

by 반바

외식 싫어하는 엄마가 돈 주고 사먹는 음식이 있다면 딱 하나. 그것은 바로 찜이다. 아구, 대구뽈, 해물, 꽃게, 알고니, 미더덕. 주 재료가 무엇이든 아삭한 콩나물과 바특하게 볶아낸 진한 양념. 간간히 상큼함을 더해주는 미나리의 향만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가게 마다 앙념의 편차가 심한 것 또한 찜이다. 이사를 오고 우리는 입에 맞는 양념을 찾아서 유목민 생활을 했다. 찜은 금액대가 꽤 있는 외식메뉴이다. 중짜가 4만원 대짜가 4만 5천원. 4인 가족이 공깃밥 4개에 사이다, 맥주만 주문해도 한 끼에 5만원이 넘었다. 멋진 비주얼에 감탄하며 한 입.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이 집도 아니구나. 어딘가 부족한 맛에 5만원을 태우고 나오는 길. 슬그머니 약이 올랐다. 찾기만 해봐라. 돈쭐을 내줄테다. 맛있다는 찜집을 찾다찾다 발견한 곳이 진주시 호탄동의 청담아구찜이었다.


그 후 외식은 무조건 그곳이었다. 외식 콜? 엄마와 눈이 마주치면 메뉴는 말하지 않아도 아구찜이었다. 석달 열흘을 같은 음식을 먹어도 '암시롱'인 엄마와 찜을 사랑하는 두 딸은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찜과 도원결의라도 한 듯 언제나 뜻을 함께하였다. 아빠는 제발 다른 것좀 먹자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거의 대부분 묵살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찜으로 대동단결을 외친 세 모녀와 외로운 아버지는 청담아구찜으로 향했다. 하지만 우린 그 날 그곳에 도착할 수 없었다. 청담아구찜이 와인삼겹살 집으로 업종변경을 한 거다. 망연자실한 우리는 도대체 왜? 의문에 휩싸였다. 절망한 우리의 얼굴을 보던 아빠의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를 잊을 수 없다.


그 후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오면서 대구뽈찜이 맛있는 가게를 찾았지만 이제는 가격이 문제였다. 물가가 오르니 찜 값도 올랐다. 한 끼에 6만원이 넘는 금액. 요즘 다들 그렇다고 하지만 도저히 그 돈을 주고 양념된 콩나물을 사먹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차로 30분이나 달려서! 도대체 청담아구찜은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고니박스.png


일단 곤이부터 주문했다. 그것도 업소용으로. 엄마는 손 큰 딸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하지만 대량으로 사면 저렴하고, 의지의 한국인은 버리는 재료 없이 끝까지 먹는다. 자취 10년과 서비스직 8년. 냉장고 파먹기와 식자재 재고 관리의 달인이 된 딸은 나만 믿어보라 큰소리를 떵떵 친다.


고니 열었을때.png
비닐한겹.png


궤짝으로 도착한 곤이 한 박스. 형광등 아래의 민낯처럼 노골적이고 정직하다. 설마 이게 포장의 전부인가 싶어 손톱으로 귀퉁이를 긁어보았더니 손톱 밑에 곤이 부스러기가 낀다. 오 마이 갓. 요즘 과대포장으로 말 많은 과자업계에서 본 받아야 할 실속형 포장이다.


자르기.png


생두자루를 나르며 생긴 전완근. 이럴 때 쓴다. 꽝꽝 언 곤이의 심장을 가르고, 조각 내는 광기.


소분.png


한 끼 먹을 분량만큼 소분한다. 귀찮지만 다 하고 나면 희열이 느껴지는 행위.


구물과 신물.png


냉동실 안에 차곡차곡 테트리스 한다. 이리 맞춰보고 저리 맞춰봤지만 어떻게 해도 두 덩어리가 남는다. 별 수 있나? 두 덩어리를 해동했다. 엷은 소금물에 담가 자연해동되게 두면 슬슬슬슬 풀어진다. 곤이는 구물과 신물로 나뉘는데 구물은 덩어리가 크고 신물은 잘 부스러지고 좀 작은 편이다.


고니데치기.png


해동된 곤이는 뜨거운 물에 데쳐낸다. 데치고 나서 물에 헹궈주는데 오렌지 컬러의 실같은 게 보인다.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 고래회충이다. 비위약한 아빠가 보기 전에 얼른 제거한다. 손질을 다 한 탱글한 곤이를 보니 8천원 주고 추가했던 곤이의 2배가 넘는 양이다.


이거다. 바로 이거야. 조금 번거롭지만 이 푸짐한 양을 보면 집에서 해먹는 걸 멈출 수 없다.


고니찜.png


양념은 요리로 유명한 유튜브들을 뒤지고, 이제는 어렴풋한 청담아구찜의 맛을 떠올리며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최종 픽 양념은 라면스프처럼 가루를 섞는 간편한 양념이다.


고춧가루, 소금, 다시다, 후추, 감자전분을 섞어둔다. 눈대중이라 비율은 정확하지 않지만 고춧가루 5 다시다1 감자전분1 후추 0.5 모자란 간은 맛소금으로 채운다.


기름을 두른 팬에 데쳐낸 곤이와 준비한 해물(이 있다면) 넣고 볶는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슬쩍 데쳐낸 콩나물을 넣은 후 스프를 넣는다. 물로 농도를 맞추며 잘 섞어준 후, 다진마늘과 미나리, 대파 등 향신채소를 넣으면 끝. 매운 게 땡기는 날은 청양고춧가루를 넣어 땀이 삐질삐질날 정도로 맵게 먹는다. 콧잔등에 땀이 송송 맺힌 엄마의 미간이 팍 모이며 따봉을 든다. 배불리 먹고 난 후 달콤한 디저트같은 뿌듯함이 솟는다.


이제 찜은 집에서 먹는다. 찜 한 번 사먹을 돈으로 스무 번은 넘게 곤이찜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곤이는 알을 뜻하고, 진짜 이름은 이리다. 그런데 이리찜이라고 하면 어째 말 맛이 안 산다고나 할까? 업소용 곤이를 사고 난 후, 우리의 오랜 유목생활은 마무리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