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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차린 밥상 002

배추전

by 반바

아이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구성진 트로트 한 자락. 냉장고 야채칸을 보며 흥얼거린 노래 제목은 보릿고개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딱 보릿고개라서 그렇다. 봄과 겨울 사이 매서운 꽃샘추위를 뚫고 뿌리내린 향기로운 냉이로 시작해, 상추, 유채를 지나 여름이 무르익으며 마당 곳곳에 심어놓은 유실수에서 나오는 과일들은 약을 안 쳐서 반은 벌레나 새가 먹고 남은 것을 사람이 먹는다. 텃밭에는 작렬하는 태양에 달궈진 토마토 가지 오이가 주렁주렁 열린다. 시간이 흘러 가을걷이를 끝내고 나면 텃밭은 한 계절 안식을 갖는다.


겨울 텃밭. 생각만 해도 황량할 것 같지만, 여전히 텃밭을 지키고 있는 작물이 있다. 바로 이불을 뒤집어쓴 배추다. 김장에 사용하고도 남은 배추는 이불을 덮어 놓고 채소 귀한 계절에 요긴하게 쓰인다. 살짝 얼었다 해가 나면 녹기를 반복하며 단맛과 고소한 맛은 깊어진다. 우리가 심는 배추는 황금킹이라는 종자인데, 샛노란 색깔과 단맛이 일품이다.


전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해가 뜨고 기온이 올라가면 배추를 뽑아 놓는다. 배추를 뽑고 나서는 찬바람에 얼세라 단단히 이불로 덮어둔다. 흔히들 만드는 배추전은 알배추의 꺼풀을 한 겹씩 벗겨 내 묽은 반죽물을 묻혀 기름에 지져 먹지만, 배추의 밑동이 들큼하게 익은 그 느낌이 영 마뜩잖다. 어찌해 볼까 고민하다가 쫑쫑 썰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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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에 익으면 향긋해지는 파도 한 줌 썰어 넣는다. 텃밭에 있는 대파는 얼어붙어서 마트에서 사 왔다. 겨울에만 채소를 사 먹으니, 늘 채소값을 떠올리면 누런 황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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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비법은 바로 튀김가루다. 언젠가 밀가루가 똑 떨어져서 튀김가루로 전을 부쳤는데 중심부까지 바삭바삭한 그 맛에 온 식구가 뒤집어졌다. 밀가루밖에 없는데 바삭하게 먹고 싶다면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약불에서 오래 구워 수분을 날리거나, 반죽물에 옥수수 전분을 넣어보는 걸 추천한다. 비율을 알려드리고 싶지만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려 넣는 생존형 요리사라서 그 비율은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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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으로 한 컵 떠 넣은 튀김가루와 물을 2/3컵만 넣고 휘휘 저어 본다. 묽으면 펼치기 용이하지만 수분이 많아 바삭함이 덜하고, 되직하면 바삭하지만 두껍게 부쳐진다. 이거다 싶은 절묘한 쭈르륵의 느낌을 찾기 위해 물을 좀 더 넣어 보고 너무 묽어지면 밀가루를 좀 더 넣는다. 반복하다보면 반죽만 한 바가지다. 재료와 반죽 양이 똑 떨어지는 건 열 번 중에 세 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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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달군 프라이팬엔 넓게 펼친다. 온 집안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퍼지니, 전 좋아하는 아빠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부침개가 그리도 좋을까? 한 장을 먼저 내어드리고 다음 장을 굽는다. 이상하게 전을 구울 때는 첫 장과 둘째 장까지만 잘 구워지고 세번째부터는 컨트롤이 힘들다. 뜨거워진 팬에 차가운 기름이 들어가서 그런가? 기름을 적게 쓰려면 별도의 팬에 기름을 달군 후에 사용하라는데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할 만큼 딸내미는 부지런하지 못하다.


이미 반 이상 사라진 전을 한 조각 집어 들어 초간장에 찍어본다. 입 안에 넣으니 바삭한 튀김옷을 뚫고 밑동과 이파리가 고루 섞인 배추가 달디단 존재감을 드러낸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얼었다 녹았다는 반복하며 이어온 생명이라 뜨거운 기름에 그렇게 지졌는데도 아직 아삭하다. 깔딱깔딱 넘어가는 채소 보릿고개를 멱살 잡고 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 겨울배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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