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껍데기와 오이볶음
20대 시작과 동시에 부모님을 떠나 자취를 하며 지냈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학을 다니고, 졸업을 하고, 직장을 구해 살다가 30대를 목전에 두고 본가로 다시 돌아왔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겹고 고통스러웠는지, 생생한 날 것의 감정을 여과 없이 써 내려가다가 지난 일 다시 떠올려서 뭐 하나 싶어 백스페이스바를 꾹 눌렀다. 쓰면 뭐 하겠나.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발바닥의 가시가 제일 아프다. 고통은 나누면 고통스러운 사람이 둘이 될 뿐이다.
도시에서 난타당하며 떡나발이 되는 동안, 부모님은 산으로 귀촌을 하셨다. 아무래도 시골 마을이다 보니 남의 집 사정에 관심을 갖는 게 자연스럽다. 시집도 안 간 과년한 딸내미가 산에 처박혀서 뭘 하는 건가 궁금하신 분이 있었나 보다.
속 시원히 말씀드리자면...
"그 집 딸! 집에서 밥 차립니다!"
어린 딸과 성인이 된 딸은 무게가 다르다. (물론 실제 몸무게도 월등한 차이를 보입니다만) 살림에서 1인분의 몫은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처럼 빨래통에 덥석 옷을 던져두면 깔끔하게 정리되어 서랍에 들어있는 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엄마는 이 점에 대해 미리 말 한 적 없지만 본능이 그래선 안된다는 경고음을 울렸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블랙홀 같다. 검은 봉지들이 꽉 틀어박혀 냉장고 뒤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봉투를 하나하나 열며 이 것이 과연 얼마나 이 공간에 갇혀있었을지 가늠해 본다. 봉지 속에 쌓인 얼음의 두께로 세월을 유추해 가며 먹을 것, 버릴 것을 가렸다. 발굴 과정에서 엄마는 잊고 있던 반가운 녀석을 만났다.
냄비에 물을 받고 약국에서 서비스로 주신 쌍화탕을 반 병 붓는다. 냉동실에서 말라가던 생강도 털어 넣는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음식이 되기 전 돼지껍데기는 잡내가 많이 난다. 한 덩어리로 얼어붙어있던 녀석을 통째로 담가 해동과 가열을 동시에 진행한다. 끓기를 기다리는 시간에는 양념장을 만든다. 매운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 설탕, 생강, 마늘, 참기름, 후추 그리고 남은 쌍화탕. 강렬한 돼지 냄새는 더 강렬한 한방의 향으로 잡는다. 이이제이의 정신이 가득한 양념장이다.
매운맛이 있으니, 입을 달래줄 사이드 메뉴도 하나 준비한다. 오이를 동글동글하게 썰어 소금, 물엿을 부어두면 수분이 쭉 빠진다. 물기를 꽉 짜고 하나 집어 먹어보니 꼬들꼬들한 식감과 짭짤함 뒤에 단 맛이 슬쩍 스친다. 기름 살짝 두른 팬에 초록이 진해질 때까지만 볶고 깨만 톡톡 뿌리면 간단한 오이 볶음 완성. 뜨거운 오이만큼 불쾌한 것이 없으므로 창틀에 올려 시원하게 산 바람을 쐬어준다.
이제 삶은 돼지껍데기와 이이제이 양념장을 합쳐줄 차례다. 물기를 다 빼야 하지만, 성격이 급해서 한 번에 와르르 쏟아 넣는다. 기름이 사방팔방으로 튀는 걸 보고 엄마가 "어휴 저 털팔이."하고 혀를 찬다.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동안 얻은 것은 쇠약한 육신과 급한 성격, 험한 입이다.
물기 다 날아가게 볶은 돼지껍데기와 오이볶음을 한 상 차렸다. 음식은 배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다채로운 메뉴에 진심이다. 소식가이면서 미식가.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머리 아픈 조합이다.
밥상을 차리고 눈치를 살피니 꽤 흡족한 표정이다. 아빠는 이야! 감탄을 하고, 꼬들꼬들한 넘의 '발'요리를 즐기는 엄마도 흡족해 한다. 성공적인 첫 밥상이다. 이렇게 복닥복닥하게 밥 먹는 시간이 좋다. 딸이 한 음식을 즐겁게 먹는 부모님. 그림이 좋다. 같이 사는 앞날이 다 좋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