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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차린 밥상 008

석탄주

by 반바


집안 말아먹기 좋은 아이.


아빠가 나를 두고 내린 평가였다. 뭐든지 시키면 곧잘 하는 통에 재능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하나만 잘하면 그걸로 밀어줄 텐데 종목이 무엇이든지 찔끔찔끔 잘하니 이것저것 시켜보고 지원해 주다간 돈만 날린다는 거다. 게다가 나는 흥미도 곧잘 잃어버리는 아이였다. 몇 개의 학원을 다니다 말다 할 때마다 아빠의 의혹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뭐든지 찔끔찔끔 잘하는 아이는 커서 다양한 시도를 겁 없이 해내는 어른으로 자랐다. 홍익인간정신을 가진 전문가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가르쳐주는 세상이다. 호기심의 영역은 한정 없이 넓어지고 실현해 내는 결과물은 점점 더 완성도를 갖춰갔다. 날마다 망망대해 같은 인터넷 세계를 표류하던 한 인간의 호기심은 전통주에 다다른다. 술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쌀과 누룩.


이것만 섞으면 술이 된다니. 쌀을 쪄서 고두밥으로 만들 것인지 가루 내어 죽을 쑬 것인지, 누룩의 종류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덧술을 한번 할 건지 두 번 할 건지, 발효 후 바로 먹을 건지 냉장고에 두고 숙성해 탄산감을 즐길 것인지.


어떤 방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술에서 꽃향기가 날 수도 있고, 과일향이 날 수도, 혹은 구수한 곡물의 향을 살릴 수도 있다.


고작 두 가지 재료 안에서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이 이 찔끔이의 가슴에 와닿고 만 거다. 게다가 이 찔끔이는 실행력 하나는 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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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주문한 소율곡 누룩이다. 누룩은 바로 사용하지 않고 통풍이 잘되고 햇빛이 잘 통하는 곳에서 며칠 말린다. 이걸 법제라고 한다. 살균과 묵은 냄새를 제거하는 게 목적이다. 이때 누룩을 거칠게 빻거나 곱게 빻는 등 원하는 형태로 가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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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들 술은 석탄주다. 석탄주라고 해서 까만 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아낄 석, 넘길 탄을 써서 넘기기 아까울 정도로 맛있는 술이란다. 삼키기가 아까울 정도라니. 이름만으로도 벌써 궁금해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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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쭉하게 죽을 쑤고 30도 이하로 식힌다. 어떤 사람은 체온 정도면 된다고 한다. 온도가 놓으면 도수가 높고 더 달콤한 술이 된다고도 하던데, 여차하면 누룩균이 모두 삶길 수도 있다고 했다. 초심자는 안전한 항로를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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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로 잘 닦은 통에 죽을 붓고, 법제한 누룩을 넣는다. 슬렁슬렁 섞으면 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란다. 소독한 손으로 30분 동안 죽을 치대어 준다. 죽을 치대라니? 액체를 어떻게 치대나?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한다. 누룩과 죽이 물이 될 정도로 잘 섞어야 발효가 잘 된다고 한다. 잘 섞은 후 위쪽에 묻은 흔적을 닦아내고 따뜻한 곳에 하루 둔다. 이게 석탄주의 밑술이 된다. 밑술은 술의 기본 바탕이 되는 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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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간 후 한번 끓었다 가라앉은 모습이다. 평온했던 밑술의 표면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옆에서 보면 조그만 기포도 보인다. 발효가 잘 되고 있으니 덧술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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찹쌀 1kg를 준비한다. 쌀도 뜨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여러 번 한쪽 방향으로 돌려가며 씻어준다. 대충 씻으면 술에 깔끔한 맛이 없고 잡내가 나는데, 또 박박 문질러 씻으면 쌀이 깨져서 술이 시어진다고 한다. 잘 씻은 쌀은 반나절 정도 불려두었다가 체에 받쳐 물을 빼준다. 물 빼는 작업도 불린 시간과 비슷하게 빼주었다. 물기 뺀 찹쌀을 체에 앉혔다. 고두밥을 잘 익히기 위해 쌀 표면에 연탄 같은 구멍을 숭숭 내어 주었다. 이제 한 시간 동안 찌면 된다.


이제 절반 가량 진행 했을 뿐인데 술은 사 먹는 게 이득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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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글부글 끓어오른 밑술에 고두밥을 넣는다. 이때 고두밥은 30도 이하로 식힌 것이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주걱으로 뒤적거리며 빠르게 식혀준다. 뒤적이면서 빠르게 식히지 않으면 물이 맺히는데 이 수분이 술맛을 망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연약하기 그지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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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밥을 밑술에 넣는다. 에탄올로 손을 박박 닦은 후 주무르기 시작한다. 어른의 촉감놀이란 이런 걸까? 고두밥을 치댈 때 볼 영상은 30분 정도 되는 분량으로 넋을 놓고 볼 수 있는 걸로 골라서 틀어 놓는다. 영상이 끝날 때까지 덧술을 주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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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치댄 후 다시 벽면을 깔끔하게 닦아내고, 하루가 지난 모습이다. 고두밥이 수분을 머금어 기울여도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24시간 간격을 두고 두 번 정도 잘 섞어준다. 이제 끝이다. 지금부터는 어두운 곳에 두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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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부터 아래쪽에 술이 고이기 시작한다. 술병에 귀를 대면 톡톡 터지는 소리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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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가볍게 체에 받쳐 원액만 따로 빼낸 후 별도로 냉장고에 보관했다. 석탄주를 흠뻑 머금은 남은 지게미에는 물을 섞어 막걸리로 마셨다. 이미 훌륭한 맛이었지만 내가 기대한 건 페트병 속에 잠들어 있는 원액이었다. 페트병에 담아 냉장고 가장 아래 칸에서 한 달의 저온 숙성을 거치면, 샴페인 저리 가라 할 만큼의 탄산이 생긴다고 했다.


고대하던 한 달 후. 누룩 법제로부터 따지자면 무려 두 달 열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병을 조심스럽게 세우고 뚜껑을 돌리니 탄산 빠지는 소리가 우렁차다. 몇 번을 넘치려고 해서 진정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두 달을 기다린 것보다 탄산 빠지는 걸 기다리는 게 더 힘들었다.


맑은 윗부분을 따르니 끊임없이 기포가 올라온다. 용천약수터에서나 보던 모습이다. 한 입 머금으니 사과향이 진동을 한다. 새콤달콤한 맛. 쌀과 곡물만 넣었는데 어떻게 이런 향이 날까? 마트 가면 과일향 발포주가 넘치는 세상에 사는 나도 신기한데, 옛날 사람들이 이 맛을 봤다면 삼키기 아깝다는 생각을 했을 거 같다.


전통주라서 전이랑 먹으려고 했더니 기름진 안주보다는 데친 해산물이나 과일안주, 크래커, 치즈랑 더 잘 어울린다. 맛있다. 연거푸 홀짝이는데 비어 가는 잔을 보니 지난 두 달 반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 삼키기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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