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면
그날은 몹시 추웠다. 꽁꽁 언 엄마 손을 잡고 부림시장 먹자골목으로 들어서자 노란 불빛들이 축축하게 젖은 길바닥과 어두침침한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야외도 아니고 실내라고 할 수도 없는 곳. 수증기에 흔들린 불빛 때문에 동화 속 환상의 나라에 온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네모난 노점 조리대 안에서 누빔 조끼를 입고 두건을 쓴 아줌마들의 끈질긴 호객을 지나친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안쪽으로 향했다. 나는 구정물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아까 그 아줌마들이 있던 곳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노점이었다.
구멍이 숭숭 난 철제 덱 위에 판자를 얹고 그 위에 장판으로 타카를 박아 고정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바로 앉기엔 의자가 높아서 까치발을 들고 한쪽 엉덩이를 먼저 올려놓고 트위스트를 추며 올라앉아야 했다. 등받이 없는 의자라 엄마가 내 등을 받쳐줬다. 아까 그 아줌마들이랑 비슷하게 생긴 주인이 뭘 먹겠냐고 물었다. 엄마는 고민도 없이 쫄면을 달라했다. 나도 엄마를 따라 쫄면을 시켰다. 옆자리에 앉은 손님 둘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겨울에도 쫄면을 파나?"
"파니까 해주겠지."
어릴 때라 무슨 일로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내가 쫄면 한 그릇을 뚝딱 할 정도는 컸고, 성가신 동생 없이 엄마와 단 둘이 하는 외출이라서 신이 났다는 점이다.
주인은 장사를 꽤 오래 했는지 손이 무척 빨랐다. 죽죽죽 뜯고 비벼낸 면을 끓고 있던 들통에 휙 집어넣고 체로 솜씨 좋게 건졌다.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두어 번 끼얹어 빨래하듯 바락바락 비볐다. 스냅을 이용해 노란 면 위에 뻘건 양념을 '챡' 뿌리고는 역시 바락바락 주물러 색을 입혔다. 전문가의 능숙한 움직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을 매료시킨다. 순식간에 은색 냉면기 두 개에 담긴 쫄면이 우리 앞에 나왔다. 가위로 두 번 자른 쫄면을 그득 입에 물었다. 참기름향이 솔솔 나는 차갑고 매콤한 면이 매끄럽게 들어왔다. 너무 추워서 입이 돌아갈 것 같으면 후추가 듬뿍 뿌려진 뜨끈한 육수를 떠먹으면 그만이었다.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부터 쫄면을 좋아했다고 했다. 입덧으로 울렁거릴 때마다 다른 건 하나도 생각 안 나고 쫄면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고 했다. 산호동 국민주택에 살 적에 쫄면을 먹으러 갔다가 아빠와 싸운 건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영양가도 없는 고무줄 같은 거 먹는다고 땡고함을 지른다 아이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30년이 훌쩍 넘고, 이젠 쫄면을 만들어 드릴 정도로 컸는데. 기억력 안 좋은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임신했을 때는 먹을 걸로 서럽게 해서는 안 된다.
물부터 넉넉히 올린다. 그리고 아빠가 흥미를 가질만한 10분 내외의 유튜브 영상을 찾아서 켜 놓고 쟁반과 쫄면면 3덩어리를 드린다.
"내보고 해라꼬???"
분명 속으로 영양가도 없는 고무줄이라고 구시렁거릴 게 분명하지만 기 센 딸의 등쌀에 그 정도는 속으로 숨길 줄 아는 아저씨로 진화했다.
항상 정해진 레시피 없이 집에 있는 걸로 양념을 만들기 때문에 그때그때 양념이 다르다. 수고로움을 감수할 마음이 있을 땐 블렌더에 양파와 사과나 배 따위를 넣어 붕붕 갈고 고춧가루와 간장 설탕 식초를 넣고 섞는다. 좀 더 진득하고 감기는 맛이 필요하면 고추장도 한 숟가락 넣는다. (여기에 생강가루와 후추를 넣으면 비빔냉면 양념이 된다) 한국인이지만 음식에 마늘 많이 넣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한 톨 정도 다져 넣거나 아예 생략할 때도 있다. 맨 김을 불에 구워서 양념에 부숴 넣으면 맛이 풍부해진다. 만사가 귀찮을 땐 고추장에 간장 설탕 식초를 넣고 땡이다.
양배추는 채 썰어 놓는다. 물이 끓으면 콩나물부터 데쳐서 찬물에 건져놓는다. 우리 집에서 양파 당근 오이는 선택사항일 뿐이다. 콩나물 데친 물은 버리지 않고 아빠가 뜯어놓은 면을 넣고 휘휘 저은 뒤 면이 익을 때까지 삶아낸다.
부림시장 먹자골목 사장님처럼은 못하지만 전분기가 사라질 때까지 흔들흔들 면을 헹궈낸다. 물기 잘 뺀 면과 채소, 양념을 넣어 버무리고 참기름과 통깨를 솔솔 뿌리면 쫄면 완성.
각자의 몫을 담고, 부림시장의 추억을 떠올리며 육수도 한 그릇씩 준비했다. 식탁에 올린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흘러넘친다. 먹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 시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요리가 있었나?
"이야 이번 양념 잘 됐다. 혹시 담에도 똑같이 재현 가능하나?"
"그건 좀 어렵다. 집히는 대로 넣어서."
결혼 37년 차에 접어드는 아빠도 입맛이 변했는지 한 입 가득 면을 집어 올린다.
"맛있네."
하물며 뱃속에서부터 먹어온 모태 쫄면러인 나는 두말할 것도 없다.
음~!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