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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차린 밥상 010

시골빵

by 반바


밀가루를 포대로 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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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가 올 거란 예보를 보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강력분 20kg을 주문한 거였다.


장바구니 속 대부분의 식재료는 대용량 혹은 업소용이다. 2022년 여름. 폭우로 인해 일주일이나 산 아래 마트에 가지 못했다. (길이 끊어진 건 아니었지만 도로 바로 옆에 계곡이 문제였다) 쌀이 떨어져 감자와 양파를 먹고, 그 마저도 바닥을 보일 때. 텅 빈 채소 바구니를 보며 공포를 느꼈다. 그날 이후 모든 식량을 박스 단위로 주문한다.


부모님은 헛웃음을 지었다.


"딸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0kg는 좀 심한 거 아이가?"

"이상 기후 무시하면 안 된다. 일이 우째 될 줄 알고?"


2025년 7월 16일에 시작된 폭우는 나흘 만에 누적강수량 700mm를 넘겨 버렸다. 시간당 100mm 물폭탄 아래에 있을 때는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나흘 째가 되어서야 소강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한 빗줄기에 우리 가족은 부랴부랴 바깥으로 향했다. 나는 서둘러 여래에게 비옷을 입혔다. 이때를 놓치면 또 언제 퍼부어 댈지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산책을 못 나가 뿔이 솟을 대로 솟은 상태였다. 우산을 끼고 산 아래쪽 향하는 길. 눈앞에 워터슬라이드가 보였다.


진짜 단단히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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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동네와 연결된 유일한 길이 막혔다. 산 아래가 정말로 무너지기라도 한 건지 인터넷도 먹통이었다. KT에 전화했더니 아예 마을 초입부터 신호가 안 잡힌다며 이건 원격으로 처리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언제 고쳐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우리 집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위성방송 수신기가 있어 뉴스는 볼 수 있으니까. 이웃에 사는 분들은 TV도 먹통이 되었다. 무료하시면 우리 집으로 오시라 하고 싶지만 앞 뒤 길이 산사태와 넘쳐버린 계곡으로 모두 막혀버렸다.


산 속의 섬이 되어 버린 우리 집


갑자기 주어진 기약 없는 자유시간에 발효 시간이 길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시골빵에 도전해 본다. 포카치아 반죽의 변형이다. 강력분 300g, 물 200g, 소금 5g, 이스트 2g, 올리브 오일 10g. 슬렁슬렁 섞어 30분마다 한 번씩 폴딩 해준다. 폴딩을 반복할 때마다 거칠었던 반죽은 점점 더 매끈해진다.


하루 냉장하면 밀가루의 풍미가 깊어진다길래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음 날 꺼냈다. 냉장고에서 꺼내고도 잠시 기다려야 한다. 냉기가 빠지길 기다리며 다시 한번 가스를 빼준다. 남는 시간 동안 얼려둔 토마토 페이스트를 녹이고 양파와 마늘에 소금간만 한 심플 토마토소스를 만든다. 토핑은 밭에서 뜯어온 바질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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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죽죽 늘린 반죽 위에 소스를 바르고 바질 잎을 무심하게 툭툭 얹는다. 너무 공들이면 오히려 멋이 없다.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높은 온도에서 맛있는 냄새가 날 때까지 굽는다. 에어프라이어 바람에 바질이 날아가 옆에 붙어버렸지만 꽤 그럴싸한 빵이 나왔다. 기공이 큼직큼직한 게 폭신한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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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성공에 고무되어 한 발 더 내딛어 본다. 이번에는 깜빠뉴다. 밀가루 100% 을 기준으로 물은 77% 소금은 2%를 잡아 5 배합했다. 이스트는 딱 3g만 썼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발효 시간을 거쳐 무쇠팬과 함께 오븐에 입장!


구수한 누룽지 맛이 나는 깜빠뉴가 완성되었다. 이토록 심플한 재료로 이런 향미가 나오다니? 감탄하며 연달아 빵을 굽는다. 포카치아, 깜빠뉴도 모자라 르방을 키워 사워도우까지. 빵을 구우려면 꼬박 하루가 걸리니 몇 판 굽다 보면 고립된 시간도 쏜살같이 지나간다.


열흘이 지나서야 인터넷이 개통되었다. 그동안 작은 소동이 있었다. 알뜰폰을 쓰던 이웃의 전화가 먹통이 되는 바람에 타지에 있는 자녀가 119에 신고했다. 하지만 119에서도 빗발치는 구조요청에 출동인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이장님이다. 올해 취임하자마자 산불때문에 엄청 고생을 했는데, 이번엔 산사태다. 하지만 이번엔 이장님도 꼼짝없이 고립이다. 집을 사이에 두고 큰 산사태가 난 거다. 그 집과 가장 가까이 사는 우리에게 공이 넘어왔는데 우리라고 별 수 있나. 마을이 모두 조각조각 나는 바람에 서로의 생사도 확인이 어려웠다. 통화가 가능해지기까지 그 집 아들이 부모님 걱정에 며칠 동안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


비가 그치고도 한참이나 고립되어 있었다. 마을로 통하는 3km의 도로에 무려 23건의 크고 작은 산사태가 났던 것이다. 큰 도로 위주로 중장비가 투입되어 이런 작은 길은 좀 기다려야 한단다. 이웃들은 쌀이 떨어져 간다며 걱정일 때 포대로 산 밀가루 덕분에 식량 걱정 없이 재난을 무사히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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