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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Aug 05. 2020

발 이야기

작은 사고가 있었다.


일요일이라 늘어지는 마음을 다잡고 몸을 좀 움직여 보려 짐볼 위에서 장난을 치던 중이었다.

두 팔과 몸통으로 짐볼을 둥글게 감싸 안고 오른쪽 어깨 쪽으로 구르기 시작하면 내 몸도 공처럼 부드럽게 굴러질까 생각하며 오른쪽 어깨로 구르기 시작한 찰나 내 앞에 벽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벽이 나로부터 얼마나 멀리 혹은 얼마나 가까이 떨어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허리나 꼬리뼈로 벽을 찧기라도 하면 대형사고라는 걱정이 스치고 지나갔고, 그 때문인지 그 직후에 내 왼쪽 두 번째와 세 번째 발가락이 벽을 엄청나게 큰 소리로 찧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놀라면 악 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발가락을 움켜쥐었다. 처음엔 별로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감각이 별로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팔꿈치 찧으면 잠깐 아무 감각이 없다가 쓰나미 같은 통증이 밀려오는 것처럼... 잠시 후에는, 아팠다. 날카로운 아픔이라기보다는 지긋한 아픔이었다.

충돌로 인한 고통이 잦아들 때 즈음 발가락을 살짝 움직여봤다. 다행히 운동 감각에는 별 지장이 없는 듯했지만 움직이니 다시 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손으로 발가락 마디마디를 움직여봤다. 대단하게 뼈가 부러지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근육이 조금 놀랐거나 인대가 살짝 늘어났거나 혹은 미세하게 실금...?' 이런 가능성들을 상상하며 잠시 이제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아무래도 약간의 응급조치가 필요한 정도의 부상은 되는 것 같았다.


전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을 심하게 접질렸을 때 톡톡히 효과를 본 응급처치 방법을 기억해냈다.

RICE: Rest(휴식)+ICE(냉찜질)+Compression(환부 압박)+Elevation(환부 올리기)

다친 부위가 발, 정확히는 발목이었는데 또 응급처치가 필요한 순간 발을 부여잡고 있다니, 발에게 좀 미안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발은 허리나 목이 다치기 전에 자기가 나서서 벽을 찧고 장렬히 부상당한 것일까?


아무튼, 얼른 집에 있던 항염증 연고를 바르고, 아이스 팩으로 냉찜질을 하고, 압박 붕대는 떨어지고 없어서 급한 대로 스포츠 테이프를 잘라 살짝 발가락을 고정했다. 그리고 다리를 심장보다 높은 곳에 올려 두고 한 숨 잤다.

한 숨 자고 나니 처음의 육체적 정신적 충격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지만, 다시 걸으려고 해 보니 발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가장 아픈 부위는 두 번째 발가락 첫 번째 마디 관절 부위였다.

아무래도 오늘 운동은 물 건너간 것 같다. 이따 저녁때 레슨을 못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비도 쏟아붓는 것처럼 내리고 하니 '수업이 취소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우리 발의 뼈는 손의 뼈와 거의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고 발가락 뼈는 우리가 '발가락'하면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길다. https://unsplash.com/@ninoliverani


다른 사람들의 운동을 지도하는 일을 하면서 몸을 이전보다 훨씬 아끼게 되었다. 물론 애초에 몸을 여기저기 막 내던질 만큼 용감무쌍한 기질이 전혀 아니기는 하지만, 몸이 다치거나 아프면 내 삶과 일에 상당히 큰 차질이 생긴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었다. 발목을 접질렸을 때에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내일 수업 어떻게 하지? (엉엉)'이었다.


그 와중에도 목이나 허리처럼 몸의 중심축이 되는 부위를 심하게 다치는 것은 가장 상상하기 싫은 상황 중에 하나인만큼 대신 손이나 발과 같은 말단 부위들이 고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아마 요가 강사로서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진 생존 본능일 것이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단 부위'라고 쉽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발이 그 중요도에 있어서도 '말단'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의 움직임과 자세에 있어서 지면과 접촉하는 기반이 되어 주는 발은 상당히 주요한 기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발이나 발목 부상을 입은 경우, 이 부상이 오래 지속되면 무릎이나 허리(골반) 통증, 심지어 전신의 통증으로 발전되는 일은 상당히 흔하게 발생한다. 통증으로 인해 발과 발목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약간의 절뚝거림이 생기면, 그 스트레스가 자연스레 위쪽에 인접한 관절과 근육에 무리를 주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 몸이 튼튼하고 균형이 좋은 사람들은 그 영향이 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걷고 서는 자세와 동작에서의 불균형은 온몸에 영향을 미친다. 원래 무릎이 안 좋은 사람은 무릎 통증이 더 심해지고, 원래 허리가 안 좋은 사람은 요통이 더 심해지고 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나와 개인 레슨을 하는 회원 중에 여기저기 자주 까지고 베이고 멍들고 하는 분이 있는데 (아마, 대부분 주변에 한 두 명은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없는 것 같으면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보라.) 그중에 발바닥이나 발가락을 다치고 나면 꼭 무릎과 종아리, 혹은 허리의 통증이 동반되곤 한다. 수업을 하다가 "으앗! 오늘 오른쪽 종아리가 너무 아파요!" 하셔서, "어? 왜 그러지?" 하다가 오른쪽 뒤꿈치에 밴드를 붙여 놓은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오른쪽 무릎이 계속 아팠어요." 하셔서 살피던 중에 오른쪽 발가락이 부어 있는 것을 보게 되기도 한다. 발가락이 부어서 무릎이 아픈 것인지, 무릎이 아파서 발가락이 부은 것인지의 인과 관계는 확실치 않지만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https://unsplash.com/@monicasilva

사실 위에서 벽에 부딪히고 처음에 발가락에 감각이 별로 없었다고 했는데, 이게 충돌의 여파로 무감각 해진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내 발가락 자체가 아주 예민한 부위는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만약 손이 이와 비슷한 정도로 부상을 당했다면 이것보다 훨씬 크고 예민한 통증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발가락 감각이 예민하지 않다는 것은 간단한 게임을 해봐도 알 수 있다. (혹시 옆에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면 당장 한 번 해보시라) 한 사람은 눕거나 눈을 감아서 발가락이 보이지 않게 하고, 다른 사람은 눈을 감은 사람의 한쪽 발의 발가락들을 터치하여 몇 번째 발가락을 터치한 것인지 알아맞추는 게임이다. 어린 시절에 쎄쎄쎄 하다가 벌칙으로 엎드려서 목 뒤를 손가락으로 콕 찍고 무슨 손가락으로 찍은 것인지를 알아맞췄던 그 게임과 비슷하다. 다만 터치한 손가락이 아니라 터치를 당한 자신의 발가락이 몇 번째 발가락인지를 맞추는 것이니 어쩌면 훨씬 명백하고 쉬운 게임 세팅이라고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이때 엄지와 새끼발가락은 굳이 안 해도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엄지와 새끼발가락을 헷갈려하는 사람은 없다. 터치하는 사람이 살짝 기지를 발휘하여 너무 세지 않게, 그리고 살짝 헷갈리게 이 발가락 저 발가락 왔다 갔다 해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게임은(이건 혼자서도 해 볼 수 있다.) 내가 발가락을 하나씩 움직일 수 있는지 보는 것이다. 바닥에 앉아서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발은 바닥에 둔 상태에서 발가락들만 들어 올린다. 그리고 새끼발가락부터 하나씩 차례로 바닥에 내려놓아 본다. 엄지발가락까지 내려놓은 후에는 다시 엄지발가락부터 하나씩 들어 올려 본다. 분명히 단독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구간이 생길 것이다. 내려놓을 때? 혹은 들어 올릴 때? 언제 어떤 발가락들이 쌍으로(혹은 더 큰 그룹으로) 움직이는지 확인해 보시라.


이 글을 읽다가 정말 해본 분들은 느꼈겠지만,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첫 번째 게임을 할 때 나도 처음에는 '에이 설마... 내가 내 발가락이 몇 번째 발가락 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둔하지는 않지!' 하면서 자신감이 있었는데, 터치가 거듭 될수록 점점 내 감각 맵핑이 꼬이면서 2번째인지 3번째인지, 3번째인지 4번째인지 너무나 헷갈려했던 경험이 있다. 두 번째 게임 역시, 내 회원분들에게 시켜 보면 다들 허허하며 실소를 터트리는 구간이 꼭 생긴다. 심지어 그렇게 발가락을 움직이다 보니 갑자기 발가락이 아픈 것을 발견했다는 분들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https://commons.wikimedia.org/

아주 유명한 펜필드(Penfield)의 감각-호문쿨루스(Sensory-Homunculus) 사진이다. 뇌에서 몸 각 부위의 감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민감도(대뇌 피질의 크기)의 비율로 인체를 재구성한 모형인데, 보면 손의 거대함에 비해 우리 발은 왜소하기 짝이 없다. 물론 감각적 민감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기질적으로도 다르고 우리가 몸을 어떻게 사용해왔는지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가 난다. 위의 게임을 해보면, 하나도 못 맞추고 혼비백산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거의 대부분을 맞추고서 '이게 왜 어렵지?'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구들을 주로 다루며 더 큰 자유도와 세밀한 가동성을 가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손에 비해, 몸이 받는 모든 중력의 무게를 묵묵히 버텨내며 우리의 바닥이 되어 준 발이 감각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더군다나 문명의 발달로 인해 양말에 신발까지 겹겹이 발을 감싸고 다니는 우리의 발과 발가락들은 움직임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잃고 또 잊어 왔다. 이런 맥락에서 점점 후천성 평발이 많아지고 있다는 기사들도 나에게는 매우 의미 심장하게 보인다.


어떻게 우리 발에게 감각과 움직임을 다시 찾아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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