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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Aug 07. 2020

몸-상-담

'나'를 살기 위해 나를 쓰는 일과 삶에 대하여

오늘은 상담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심리 상담을 꾸준히 받은 지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기관에서 1년 정도 무료 상담을 받고 마무리했었고, 이후에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사설 센터를 찾았다. 지금 상담 선생님과 함께 한지도 벌써 15개월 정도 되어간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


심리 상담이든, 정신과 진료든, 무엇이든 간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마음/생각/감정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지는 훨씬 오래되었다.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믿을 만한 시설과 선생님을 알아보고 실제로 상담을 시작하기까지 주저하며 오랜 기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정말 제대로 힘든 시기가 오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나를 움직이게 했다. 전에 꽤 길고 지속적인 무료 상담을 받아 본 경험이 있었고 꾸준히 심리 관련 콘텐츠들(책이나 팟캐스트)을 접해 왔기 때문에 상담실 문턱이 조금 더 낮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게도 오래 대기하지 않고 원하는 선생님과 상담을 시작할 수 있었고, 적절한 시기에 절실한 도움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나한테 이런 서비스가 정말 필요한가? 비용도 비쌀 텐데 꼭 받아야 하나? 나 혼자서 어떻게 해결이 안 될까? 선생님은 괜찮을까? 괜히 해보고 돈만 날리는 건 아닌가?'


대략 이런 생각들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상담 시간과 오가는 시간을 포함해서 약 3시간, 매일 커피 2잔씩은 마실 수 있을 만한 비용, 그리고 쏟아야 하는 마음의 수고까지... 이 모든 것들을 '투자' 할만한 가치가 있는 서비스인가? 여기 '투자'라는 단어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단어가 지금 내가 상담에 대해 느끼는 것에 비해 너무 계산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글쎄... 내가 밥을 해 먹으면서 식료품 가격과, 장보고/요리하고/먹고/치우는 시간과, 나의 노동력을 계산해서 한 끼에 얼마나 하는지를 따지고, 이 시간과 금액과 노력을 투자해서 밥을 먹을 가치가 있는지를 저울질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다른 말로 하면, 이제는 상담을 받는 것이 그만큼 내가 살아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로 느껴진다고 할 수 있겠다.


자아를 인식하고 규정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나는 '나'란 녀석이 내 몸과 내 맘 사이에 끼어있는 무엇, 혹은 그냥 나는 내 몸이자 맘이지만 몸도 맘도 아닌 무엇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뭔 소린지...? 혹시 이런 "뭔 소리"조차 읽고 공감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저랑 친구 하실래요?) '나'는 끊임없이 나를 경험하기 위해 분투하는 의지인 것 같다. 혹은 그 경험들 자체가 '나'를 구성하거나... 그렇기 때문에 내 몸에 대한, 그리고 맘에 대한 경험이 결여되면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몸과 맘을 구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일상적으로 나를 경험하는 방식이 크게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실체로 구분되기 때문에 이렇게 쓰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담을 받는 시간은, 자꾸만 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나를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특히 언어라는 창구를 통해 나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이런 작업이 이루어진다. 상담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 '나'가 너무 오래, 깊이 가라앉아 있어서, 구명정을 타고 내가 있는 좌표를 찾아내서 손을 뻗어 나를 물 위로 잡아 올려줄 라이프가드가 절실히 필요했다.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다.


상담을 하는 것은 일주일에 1시간 남짓이지만, 이렇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지면 일상 속에서 혼자서도 이런 작업을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최근에는 매주 1회 해오던 상담을 격주에 1회 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나'를 끌어올리는 작업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 힘으로 떠오르는 법을 조금씩 배웠기 때문이다. 아직은 잘 상상이 안되지만, 언젠가 나에게 무섭기만 했던 바다를 혼자서도 유유히 헤엄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기대가 된다.




그간 상담을 받으면서 점점 명확해진 생각인데, 사실 내가 하는 일도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해주는 일과 비슷하다. 적어도 내 일에 대한 스스로의 역할 규정 및 목표는 그렇다. 다만 나는 사람들이 '몸'을 통해 자기 자신과 만나도록 돕는다. 내가 몸을 경험하고 알아차리는 일에 대한 전략과 기술은 맘에 대한 부분보다 훨씬 숙련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전문성을 이루는 중요한 영역이다. 퍼포머로서 몸을 움직여 공연을 만드는 과정이나, 요가 강사로서 스스로 운동을 하고 또 그 운동을 가르치는 표면적인 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해내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이러한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소위 몸 쓰는 일을 하는 배우나 운동 지도자에게만 필요한 일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일이 심리 상담사나 신경정신과 전문의에게만 필요한 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몸을 돌보는 일 역시 누구나 해야 하고, 할 수 있고, 심지어 하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다. 나는 직업인으로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내 몸을 '경험' 한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의 몸으로서 살고 있지만, 사실 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잘 감각하지도 못한다. 몸에 있는 감각 기관 대부분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흔히 오감으로 꼽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내 몸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고 해도 이는 대부분 내 몸을 외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이 오감에서 제외되곤 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감각인 고유수용감각은 (전정계를 통한 균형 감각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하게 우리가 몸을 내부적으로도 감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실상 내가 내 몸을 나라고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우리의 근골격계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이 감각 덕분이다. 그러나 이렇게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쉽게 잊히고, 잊힘으로써 고장 나기도 쉬운 감각이 바로 고유수용감각이다.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의 저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장에는, 이 고유수용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크리스티너의 병례가 소개된다.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이 감각을 잃어버리면 "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어쩌면 그 어떤 느낌조차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크리스티너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감각할 수 없기에 거기에 힘을 줄 수도 없고, 그로 인해 두 발을 딛고 설 수도, 물건을 집어 들 수도 없다. 이런 상태를 단순히 육체와 자아 사이의 연결이 끊긴 것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육체 자체가 자아를 규정하는데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너에 대한 올리버 색스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고유감각과 함께 근본적인 것을 잃은 것이다. 정체성을 기질적으로 유지해주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자아의 토대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아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이다.'"(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조석현 옮김, p.99, (주)알마) 


크리스티너와 같이 고유수용감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 감각이 부분적으로 둔해지거나 상실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고유수용감각의 수용기가 근육과 뼈, 힘줄 등에 분포되어 있는 만큼 이런 부분들에 손상이 발생하면 고유수용감각의 기능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손상은 급작스러운 사고뿐 아니라 일상적인 피로에 의해서도 쉽게 발생한다. 내 몸을 제대로 감각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장애는 누구나, 언제든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더 비관적인 사실은 손상된 근육이나 관절이 성공적으로 회복된다고 해도 고유수용감각의 민감도와 정확도가 자동적으로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물리적인 손상의 회복뿐 아니라 지각적 차원의 재활성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즉, 내 육체적 자아를 잘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쏟는 작업이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몸을 가꾸고 돌보는 데 엄청난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자한다. 하지만 그것에 비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들여다보고, 몸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에 익숙한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고 감히 말한다). 왜냐하면, 그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맘대로 살면서도 내 맘에 무슨 생각과 감정이 지나가는지를 잘 알지 못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내 몸을 움직여 삶을 살고, 일을 하고, 심지어 운동을 하면서도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순간순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신에게 드릴 게 없어서 나의 마음을 드려요." 하는 아이유의 노래 가사처럼, 몸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마음만은 쏟아주어야 한다. 특정한 형태로 가꾸거나 바꾸기 위한 관심이 아닌, 지금 바로 여기 존재하는 내 몸과 나에 대한 그런 관심 말이다.


얼마 전에 회원 한 분으로부터 두고두고 나에게 힘을 줄 감동적인 수업 피드백을 받았다.

"평생 몰랐던 OOO(본인 이름)를 만난 것 같아요."

60대의 여성 회원분이셨고, 1:1 수업을 하고 난 후였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바로 일어나지 말고 뒹굴거려보라"는, "뒹굴거리면서 오늘 내 몸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를 몇 분이라도 그냥 봐주라"는 내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는 분이셨다. 요즘도 매일같이 5분이든 10분이든 시간과 마음을 들여 뒹굴거리며 느낀 편안함, 불편함, 뻐근함, 시원함, 그 외에도 많은 감각과 그로부터 파생된 생각을 매 수업마다 나에게 기쁘게 '보고'해주신다. 이런 분이시기에 몸을 통해 자신을 만나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들이고 나를 쏟아서 몸을 감각하는 경험은, 그 감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완성된다. 그 발견의 순간이 나와 함께하는 수업에서 찾아왔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상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무한히 감사하고 행복했다.


나는 몸을 통해, 움직임을 통해 나와 당신을 만나길 원한다. 당신이 몸을 통해 당신을 만나는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 기쁘다.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 즐겁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경험이 당신에게도 매우 즐거울 뿐 아니라 삶을 충족시키는 예술적인 순간이 될 거라 확신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 함께 몸에 대해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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