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을 바꾸는 내 몸의 지혜
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를 시각화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몸을 움직이고 사용하는 데 있어 생각보다 중요하다. 가령 내 뼈가 어떤 모양으로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고, 그 주변의 근육들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고 마음속으로 시각화할 수 있게 되면 내 몸을 사용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진다.
며칠 전에 개인 레슨을 하다가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회원들이 스스로 조금 더 좋은 정렬을 찾을 수 있도록 골격에 대한 정보와 그에 따른 시각적, 언어적 이미지를 많이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때는 앉아서 몸통을 비트는 자세를 하기 위해 먼저 그 회원이 '잘 앉을' 수 있도록 좌골(앉았을 때 골반의 가장 기저가 되는 부분)이 바닥에 잘 닿게 한 상태에서 척추가 그 위로 하나씩 쌓아 올려지는 이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쌓아 올림'의 메타포를 계속 던지고 있던 와중에 두어 번 그분이 등과 허리를 뒤로 젖히는 방향으로 조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이미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분에게 질문했다.
"척추가 쌓아 올려지는 이미지가 잘 그려지세요?"
"등을 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순간 아차 싶었다. 사람들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고, 회원들과 만나 보아도 각 회원마다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 조금씩, 때로는 많이 차이가 난다. 내 이야기가 곧이곧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었지만, 조금 더 직관적인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 "척추를 쌓아 올리라"라고 했던 말이 "등을 곧게 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줄은 몰랐다.
등을 펴는 것과 척추를 쌓아 올리는 것이 뭐가 그리 다른가 싶을 수도 있다. 또 언뜻 보면 우리가 척추를 쌓아 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반해서 등을 펴는 것은 어느 정도 실질적으로 따를 수 있는 주문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해석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달리 보면 어쩌면 등을 펴는 것이 더 불가능한, 혹은 부적절한 주문이기도 하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우리의 척추는 똑바르지 않고 목에서부터 꼬리뼈까지 앞과 뒤로 여러 차례 굴곡을 그리고 있다. 우리 얼굴이 있는 쪽을 앞, 뒤통수가 있는 쪽을 뒤라고 할 때, 경추는 앞쪽으로, 흉추는 뒤로, 요추는 다시 앞으로 천추와 미추는 다시 뒤쪽으로 굽어진 굴곡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굴곡진 형태는 척추*가 하나의 길고 곧은 통뼈가 아니라 26개의 분절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이고(이 개수는 분절을 나누는 방식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인간이 두 발로 직립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구조이다. 중력은 언제나 질량이 있는 모든 것을 지면으로 당기고 있기 때문에 가장 아래쪽 척추가 받는 하중은 가장 위쪽이 받는 하중에 비해서 훨씬 클 것이다. 더욱이 이 26층의 구조 위에는 그 어떤 층보다도 무게와 크기가 큰 머리가 자리하고 있다. 꼭대기층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27층짜리 건물을 상상을 해보자. 이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구조인지 감이 올 것이다.
이러한 위태로운 구조를 가지고 몇십 년을 살아내기 위해서 인류는 다양한 전략을 가지고 진화해 온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 분절들이 위쪽 분절에 비해서 크기가 훨씬 크기도 하고 심지어 천추와 미추는 원래 각각 5개씩이던 분절들이 하나의 뼈로 융합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척추 분절의 개수를 세는 방식의 차이가 생긴다.) 심지어 천골은 더욱 넓고 큰 뼈인 골반과 꽤나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위쪽의 무게를 받칠 뿐 아니라, 그 하중을 두 다리로 안정적으로 분산시키는 교량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략이 바로 굴곡, 척추가 곧은 직선으로 쌓여 있지 않고 앞 뒤로 굴곡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굴곡은 무게가 수직 아래 방향으로만 내려 꽂히지 않도록 바깥쪽으로 분산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이 굴곡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우리 척추 구조와 이 구조를 안정화하고 움직이는 역할을 하는 주변 연부 조직들(근육, 인대 등)이 받는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등을 펴"라는 주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게 만드는가? 우리가 척추가 가진 원래의 만곡 대로 몸을 요리조리 잘 굽히고 펴게 만드는가? 사실 시도해보면 알겠지만 이렇게 요리조리 몸을 '올바르게' 굽히고 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전에 이미 등을 펴라는 말은 우리에게 곧고 바른 기둥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지 않는가? 그리고 왠지 우리의 등과 허리와 목, 척추 전체를 위를 향해 곧바르게 밀어 올려야 할 것 같은 압박을 주지 않는가?
이런 이미지를 가질 때 꽤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허리를 뒤로 조이거나 가슴을 젖혀서 등을 뒤로 조이는 것, 혹은 턱을 당겨서 목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 조금씩 펴는 부위도 방식도 다르기는 하다. 다만 큰 경향성은 분명히 있는데, 그중 하나가 습관적 사용으로 인해 자신의 몸에서 이미 약해진 부위를 더 안 좋은 방향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몸의 습관은 이미 근육과 신경 차원의 경향성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의식적 조절을 통해 통제하기가 어렵다.
가령 허리의 전만이 증가되어 있는 분들, 즉 허리가 과하게 앞으로 젖혀진 분들은 허리를 펴기 위해 허리를 더 뒤로 조여 젖히기 쉽다. 또 흉추의 후만이 감소한 분들, 즉 원래 뒤로 살짝 굽어져 있어야 하는 흉추가 평평해진 분들 역시 가슴을 더 젖혀서 이미 평평한 흉추를 더 펴려고 한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젖히고 펴는 행위는 결국 이미 무너진 척추의 만곡을 더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고, 척추 입장에서 받고 있던 부담을 덜어줄 리는 만무하다. (위의 이미지에서 앞 사진이나 뒷 사진이나 방향만 조금 다를 뿐 둘 다 척추가 굉장히 긴장되고 불편해 보임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등을 굽히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등을 폄'으로써 우리가 다다르고 싶어 하는 것은 실상 조금이나마 척추에 부담이 적은 정렬로 가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우리가 직립해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척추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매일 누워 지내지 않는 이상 이 부담을 없애거나 완벽한 정렬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우리는 '제대로' 몸을 뻗어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나는 이런 질문에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만인 공통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주문이, 어떤 이미지가 자신에게 잘 기능할지는 스스로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운동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보다 정확하고 안전한 이미지와 가이드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기는 한다. 그중 하나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골반(좌골)을 우리 척추 구조의 기반으로 인식하고 그 위에 척추 분절들과 머리가 무게의 균형을 이루며 잘 쌓아 올려진 이미지이다. 혹은 머리가 풍선처럼 가볍게 위로 떠오르는 이미지와 같이 과학적으로 적확한 것은 아니더라도 몸을 다르게 감각할 수 있는 비유적인 이미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자기 몸의 올바른 정렬을 찾아가는 길을 열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트레이너가 제공하는 정보와 이미지의 역할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몸을 다시 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참조점이 되어 이것을 기준으로 지금 내 몸의 정렬을 들여다보고, 몸이 보내는 목소리를 듣게 만드는 것이다. 균형감을 느끼면서 척추를 '잘' 쌓아 올리라는 말에서 '잘'의 의미는 사실 비어 있다. 무엇이 '잘' 쌓는 것인지에 대해 "허리는 앞으로 가슴은 뒤로"와 같이 외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것은 가장 정답에서 먼 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균형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고 있다. 아니 느낄 수 있다. 결국 이 의미의 빈칸을 언어화되고 시각화되기 어려운 감각적, 경험적 지식으로 채울 수 있는 것 역시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척추'가 머리와 골반을 연결하는 골격 전체를 이르기 때문에 척주(척추 기둥 전체)라고 하는 편이 조금 더 정확하다. 척추는 척주를 이루는 마디마디의 뼈를 가리킨다. 하지만 척주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지 않기에 어색함이 있어서 이 글에서는 그냥 '척추'라는 통용되는 단어를 사용했다.
커버 이미지: Matheus Viana 님의 사진, 출처: Pex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