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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Sep 02. 2020

"생리가 터졌습니다.
모든 계획을 변경합니다."

생리하는 몸 이야기

9월 1일, 개강. 잠에서 깼을 때 내 머릿속에는 아침에 할 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오전 10시에 화상채팅으로 하는 비대면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전에 적어도 커피를 마시며 글을 한 편 쓰던지, 운동을 하고 아침식사를 하자!'가 침대에 일어날 때 내가 세운 계획이었다. 물을 한 잔 마시며, '그래 어젯밤에도 머리로만 굴리다 결국 쓰지 못한 "아침에는 뒹굴거리는 게 좋다" 2편을 오늘 아침에는 기필코 쓰고야 말리라!' 다짐하며, 전혀 뒹굴거릴 여유가 없는 마음으로 커피 컵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억-!' 골반이 안쪽으로부터 조여지며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밑이 빠지는 느낌과 함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생리통'이라고 퉁쳐서 부르지만, 정확한 통증 부위나 통증의 정도는 매 번 다르다. 어떤 달은 복부가 심하게 꼬이듯 아프고, 어떤 달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이번처럼 누군가 내 골반기저근(케겔운동할 때 수축하는 그 근육)의 근섬유를 하나씩 잡아 뽑는 것처럼 아픈 날도 있다. 정확한 통증 부위도, 통증의 정도도 매 달 다르다. 심지어 전에 발목이 아픈 적도 있다. 사고로 인해 발목 인대가 파열되었다가 치료 및 재활이 끝난 시점이었다. 치료 이후로 발목에 통증이나 불편함이 전혀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친 발목 부위가 욱신욱신 아파왔다. 마치 생리통 때 허리가 아픈 것처럼. 그러고서 거짓말처럼 생리가 시작되었고, 보통 생리통이 지나가는 시간 이후에 발목도 괜찮아졌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시 내 몸이 감각하고 해석하는 이 통증의 의미는 너무도 '생리통'이었다.


뒤틀리는 느낌 때문에 발을 뗄 수가 없는 상태에서 생각한다. '아... 어떡하지. 일단 아파서 이 상태로는 글을 쓸 수도, 운동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요가 책들에서 요즘 연습하는 (물구나무서기와 같은) 역자세들은 생리 기간에 너무 많이 하지 말라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려고 했던 일들을 하기 힘든 이유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조금 전까지의 고민과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식탁 위에는 커피를 내리려던 컵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사실 나는 생리통이 심한 편은 아니다. 나는 한 번 생리할 때 보통 반나절 정도만 강도 높은 생리통을 경험한다. 젊을 때 생리통 때문에 직장 바닥에서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는 엄마의 '화려한' 전적이나, 그 이야기를 내 눈 앞에서 실현시켜 보여주던 청소년기 언니의 모습을 볼 때, 가족력이 이러한데 나 정도 통증이면 양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심하게 아픈 경우도 있다. 무리를 해서 피곤하거나,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나 역시 악 소리도 못 내고 반나절 이상 누워만 있어야 한다.


진통제는 필수다. 그나마 반나절 아프고 마는 나는 한 달에 한 두 알이면 되지만, 주변에서 며칠 동안 하루에 대여섯 알씩 복용해야 그나마 견디는 분들도 심심치 않게 본다. 몸에 안 좋다느니, 다음 달에 더 아프다느니, 내성이 생긴다느니 하는 '진통제 괴담'과, 이에 대응하는 "그거 다 근거 없는 이야기야.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 류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만, 이 논쟁과 상관없이 매 달 진통제를 먹어야 하는 건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런 괴담을 믿어서가 아니라 아예 진통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아픈 상황 자체가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바닥에 붙박이로 서 있던 나는 수축과 통증의 최고점이 지나간 틈을 타, 무수한 소문의 주인공인 그 '진통제'라는 것을 먹으러 간다. (생리통도 분만할 때의 진통처럼 주기가 있어서 아팠다 말았다 한다.) 생리 경력이 이제 20년에 가까워졌지만 소위 "생리 터진다"라고 말하는 월경의 발발(發)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예전보다 덜 놀랄 뿐. 생리 주기가 있고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늘 맞는 것은 아니다. 오늘만 해도 예정일보다 이틀 빨리 시작된 것이었고, 그래서 조금 더 놀라기도 했다. 나는 예정일보다 늦어지는 경우를 훨씬 많이 경험한다. 그래서인지 갑작스러움 때문에 당황하더라도 늦어지는 것보다는 일찍 시작하는 게 차라리 속 편한 것 같다. 어차피 올 고통과 불편이라면 차라리 빨리 오길 바라는 마음, 매도 빨리 맞길 바라는 마음이랄까.


이 불쾌한 월례 행사는 익숙해지지 않는 것만큼이나 쉬워지지도 않는다. 해마다 제사상 차리는 일이 어디 나이가 든다고 해서 더 쉬워지겠는가, 더 힘들면 힘들었지. (한 번도 차려 본 적은 없지만...) 노하우 정도는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허리를 이렇게 웅크리면 생리통이 좀 경감된다거나, 저런 느낌이 들 때 미리 진통제를 먹어주면 예상치 못한 통증 때문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거나 하는 나만의 노하우 말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골반이 후방 경사(골반이 엉덩이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요추는 늘어나고 꼬리뼈는 안으로 말린 상태) 되는 방향으로 뻣뻣하게 굳으면 '그 일'이 임박했음을 느낀다. 사실 어제저녁 레슨에서 이런 긴장이 느껴져서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그게 바로 내일이 될지, 이틀 후가 될지 몰랐을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진통제의 효력이 미처 다 퍼지지 않은듯한 골반을 부여잡고 요가 매트로 가서 눕는다. 후방 경사된 골반의 불균형 상태를 완화시켜줄 간단한 운동을 해보기로 한다. 골반 주변을 감싸고 있는 허리, 복부, 엉덩이 근육들(보통 코어라고 불리는 요골반복합체)을 활성화시키는 운동으로, 틀어진 골반으로 인해 불균형한 상태에 있는 인접 근육들을 함께 사용하여 협응 능력을 높이는 것이 주요한 운동 목표다. 골반이 후방 경사된 경우에는, 길어져서 힘을 잘 못 쓰는 상태에 있는 엉덩이와 허리 근육을 적절히 수축하는 동시에, 너무 단축되어 있던 복부 근육은 늘려주는 작은 동작들을 반복하여 골반이 보다 좋은 정렬 상태에 놓이게 한다. 근육을 잘 사용하면 정렬이 좋아지고, 정렬이 좋아지면 근육들이 더 잘 사용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근육들 사이에 선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혹독한 다이어트로 인해 생리가 끊긴 적이 있었다. 약 1년 반 정도 중단됐었고, 부인과에서는 체지방률이 너무 낮아져서 그런 것이라 살이 찌면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살이 붙자 생리는 다시 돌아왔다. 조금 더 심한 생리통 및 생리 불순과 함께... 이 1년 반 동안 사실, 좀 좋았다. 불편하고 귀찮은 일도, 당황할 일도, 아플 일도 없고, 몸이 오히려 짱짱한 것 같았다. 매 달 최소 일주일은 일상적인 삶을 살기 힘들게 만들던 사건이 사라지니,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나에게 매일매일이 해가 쨍쨍한 날 같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냥 그 1년 반 전체가 매우 비정상적인 기간이었고, 심각한 위기를 암시하는 이상 징후였다. 요즘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상 기후처럼. 일상을 마비시키는 이 불청객은 당장은 힘들어도 꾸준히 찾아와 주는 편이 좋겠다.


그렇기에 생리 경력이 쌓이면서 생기는 노하우 중 가장 필요하고 또 유용한 것은 예외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줄 아는 여유와 방법들이다. 오늘 내 컨디션이 결코 최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상태라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예외적인 상황은 예외이기 때문에 지나갈 것이고, 예외적인 상황에서 내 몸이, 내 마음이 예외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오늘만은 모든 계획과 작전을 걷어 치우기로 한다.


역 자세 연습은 못했지만 방금 이런 고통을 겪고도 스스로 통증 케어를 하겠다고 코어 운동을 한 나를 자랑스럽게 여겨 본다. 그런데 실제로 운동을 하다 보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고, 그러고 보니 조금 더 힘든 자세도 해 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무리하지 않고 내가 재밌는 만큼만 하리라, 아프면 바로 관두리라! 오늘은 쉽게 포기하리라!' 마음먹으며 물구나무서기 연습도 살살 해 본다. 오늘처럼 예외적인 날에는 조금 더 즉흥적이어지기를, 조금 더 나에게 관대해지기를 연습하며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Erol Ahme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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