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나라는 창
물구나무서기 연습은 몸을 써서 하는 활동이지만 이렇게 움직이다 보면 많은 생각들이 따라붙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실 연습을 하는 순간에 의식적으로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거의 없지만, 한 번의 시도와 다음번 사이 잠시 숨을 돌리는 짧은 시간이나 연습이 끝난 후에 문득 어떤 생각들이 찾아온다. 직관적으로 떠오른, 그래서 아직 이성적인 논리나 근거는 충분치 않지만 내 안에서는 설득력을 획득한 생각들이기도 하고, 이미 생각했던 것들을 몸으로 시도해 보면서 느낀 것을 정리하는 생각일 때도 있다. 혹은 서로 분리되어 있던 생각과 생각이 연결되는 통찰일 때도 있는데 이렇게 찾아오는 생각의 고리들은, 내가 물구나무서기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 새로운 생각이나 통찰은 꼭 물구나무서기가 아니라 다른 요가 아사나를 수련할 때도 찾아온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통찰의 영역은 요가를 수련하는 아주 중요한 의미이자 이유이다. 말하자면, 아사나를 마치 ‘창’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아사나 자체, 혹은 그 아사나를 ‘잘(이 어떻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수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아사나를 취하고 시도함으로써 무엇을 감각하고, 인지하고, 사유하는지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창은 나와 그 경험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고, 또 그 경험을 해석하는 틀이 된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창을 선택하고 어떻게 시도하는지에 따라,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달라질 것이다.
물구나무서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사나를 수련하는 경험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잘 취하지 않는 동작과 자세를 접하고 시도하고 연습한다. 일상적이기에 몸에 익숙한 자세나 동작들은 이미 내 몸에 내재된 자동화된 시스템을 통해서 작동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일상에서 어떻게 걸을지, 앉을지, 일어설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이렇게 매우 일상적인 동작들의 경우, 그 행위 자체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순간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그 동작이나 행위를 통해서 무엇을 취할 것인지가 더 중요해진다. 걷기 자체가 아니라 걸어서 어디를 갈 것인지가 중요하고, 어떻게 앉을지 보다는, 어디에, 왜 앉을지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일상적인 동작과 자세들을 하기 위해서는 고민을 할 필요도, 새로운 시도를 해볼 여지도 없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고, 그렇기에 어려운 몸의 정렬이나 균형을 시도하다 보면 상당히 많은 감각적, 인지적 도전을 받게 된다. 일단 내가 하려는 이 아사나는 어떤 자세이고 동작인지를 파악해야 하고, 내 몸이 이것을 어떻게 시도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 후에 직접 해보면서 내가 시도한 것의 결과를 감각하고, 잘 되지 않거나 아쉬운 점이 있으면 그 이유에 대한 나름의 가설들을 세우고 이렇게 세운 가설들과 파악한 정보들을 기반으로 다음번에 다시 시도할 수정된 방법을 찾는다. 이런 과정은 항상 의식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지만 내가 하려는 것을 조금 더 ‘잘’ 하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욕구 하에 저절로 일어나는 일들인 것 같다.
그렇다면 아사나라는 창 너머로 나는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언제나 그 풍경 속 주인공이 ‘나’라는 것이다. 내가 있는 상황이나 환경, 맥락 등은 항상 변화하고 내가 시도하는 과제도 바뀔 수 있지만 그것을 하고 있는 주체는 나이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이 역시 나다. 물론 내가 놓여 있는 환경이나 직면한 과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때의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나를 둘러싼 요소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에 반응하며, 당면한 과제를 '잘' 해내는 쪽을 지향한다. 여기서 '과제'라는 단어가 '주어진 것'이라는 수동적인 뉘앙스를 띠지만, 조금 더 내가 하고자 하는 일(task)로서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종종 내가 어떤 과제를 취하길 원하는지 잘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나를 볼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그것을 찾는 것 자체가 과제가 된다.)
나는 모든 아사나가 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물구나무서기는 창으로서 기능하기에 꽤나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누누이 이야기했듯 이 동작이 상당히 도전적인 균형과 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기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에 좋은 창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기 어렵다는 것은 더 많은 고민의 지점과 넘어야 하는 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욕망과 절제, 두려움, 트라우마, 재미, 쾌감, 끈기, 실망, 목표 의식, 중력과 균형 잡기, 근력, 좌우 밸런스, 순발력, 코어의 사용, 전신의 협응, 호흡, 역학적 이점…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물구나무서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 아니 최소한 가까스로나마 거꾸로 서서 균형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사용함에 있어 많은 요소들이 잘 갖추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심리적인 부분부터 보다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부분까지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다양한 측면에서 비춰주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물구나무서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던 나는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나’에 대해 이렇게 많은 측면에서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앞으로 발행할 글들에 대한 야심 찬 계획과 소소한 변
이 매거진을 시작하고, 글을 발행한 이래로 나의 물구나무서기 연습 경험의 심리적인 측면들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해왔다. 이후에 발행하는 글들에서는 조금 더 신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하지만 물구나무서기 자세의 신체 역학적 측면에 대한 정보들을 건조하게 늘어놓는 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데, 살아있는 몸으로서 나의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 그렇기에 주관적일지라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감각적인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 직관적인 생각을 적은 글들이 항상 과학적으로 타당한 근거들을 탄탄하게 포함하지는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저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생각들일지라도 이런 생각들이 내 안에서 설득력을 갖게 된 이유를 찾아보고 정리하는 것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커버 이미지: Ady April 님의 사진, 사진 출처: pexel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