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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범 May 26. 2022

대충 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고

진지하지만 상큼한 인생

아이패드를 열어 브런치 앱을 켜고 책상에 놓은 지 3시간 15분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주부터 붙잡고 있었지만 여태 마무리하지 못한 글을 정리해보겠다고 고군분투하다, 아니야 새 글을 쓰자 하며 15분 타이머를 맞추고 브레인스토밍을 하다, 이도 저도 아니다 싶어 멍하니 유리창 밖에서 흔들리는 은행나뭇잎들을 바라보다,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예쁘군 생각하다, 한 발 한 발 느리게 걸어가는 주인 옆에서 걸어가는 하얀 몰티즈의 총총거림을 보며 키득거리다 결국 스스로 포기를 선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쌌다.


아이패드를 닫아 가방에 넣고 지퍼를 채우는 찰나 아까 점심 식사를 하다 친구에게 '대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생각났다. 바쁘고 일이 많은 근황을 공유하면서, 대충하고 마무리해야 하는데 '대충'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친구가 자신은 대충 하면 정말 엉망진창이 돼서 대충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에게 그건 대충 한 게 아니라며, 대충은 '일단 한 번 대충 해보자'는 마음 정도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충, 그러니까 글쓰기로 예를 들어보면 초고도 대충, 수정도 대충, 탈고도 대충 해야 진짜 대충이 되는 거라며 일장연설을 했다.


작년에 사업자 등록을 한 후 혼자 홍보용 웹페이지를 만든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맡기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커서 스스로 만들기로 했는데, 홈페이지 제작 같은 것은 해본 적도 없고 프로그램을 다룰 줄도 몰라서 처음부터 잘 만들겠다는 생각을 접고 시작했었다. 그런데도 막상 시작하고 나니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부터, 안에 들어갈 사진과 내용을 마련하고 편집하는 일까지,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기도 버거웠다. 두어 달 머리만 굴리며 허송세월을 하다 안 되겠다 싶어 책상 앞에 포스트잇으로 '대충'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붙여 놓았다. 선택이 어려운 순간마다 포스트잇 한 번 쳐다보고는, 눈을 질끈 감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선택들을 해나갔다. 신기하게도 하나 둘 결정하다 보니 어찌어찌 웹페이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내 생에 최고의 웹페이지는 아니지만 첫 작품치고 꽤나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일이든 시간, 돈, 경험, 자료 등의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선택의 순간들은 대충 넘기지 않으면 끝을 보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대충 하더라도 어느 정도 질이 높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실력인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순간들은 쉽게 넘기고 어떤 순간들에 정말 공을 들여야 하는지 선택과 집중을 할 줄 아는 것이 실력자의 미덕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한계와 제약을 받아들이는 담담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시작하고 끝내기로 선택하는 용기가 모두 들어있는 태도라서 '대충'이 그렇게 어려운가 보다.


'대충'이 뭔지 친구에게 엄청 아는 척을 하고서, 오늘도 나는 대충이 어려웠나 보다. 3시간 15분 동안 변죽만 울리다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대충'에 대해 대충 한 번 써보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든 가볍게 접근해야 즐겁기 쉬운데, 상큼한 마음으로 접근하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일도, 연애도, 심지어 취미 생활도... 좋아하는 것들은 그 깊이가 더해질수록 자꾸만 무거워진다. 해가 갈수록 잘 해내야 하는 일 투성이인 부담스러운 인생에서 글쓰기만은 '대충'하는 놀이로 남겨둘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대충'의 태도를 연습해서, 진지하지만 상큼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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