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작년 5월 중순, 북유럽에서 마지막 크루즈를 탔다. 함부르크 출발 프랑스 르하브르, 영국 사우스햄튼, 벨기에 브뤼헤, 로테르담 등을 도는 일정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각각의 도시의 이름을 들었을 때 매력이 1도 없게 느껴지는 이 코스에 ‘맥주’ 라는 테마를 부여하자마자 매력이 흘러 넘친다는 게. 이 코스는 마치 “크루즈 맥주 투어”를 위해 만들어진 일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아니 양심상 프랑스 르하브르는 좀 빼긴 해야겠다. 크루즈 여행은 한 기항지에 오래 머물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그 무엇보다 필요한 여행이다. ‘맥주’에 집중하되 그 지역의 분위기를 최대한 느끼기, 이것이 내가 북유럽 크루즈 여행에서 세운 모토였다.
영국 런던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사우스햄튼은 타이타닉 배가 출발한 항구로 유명한 지역이다. 타이타닉의 비극을 다룬 박물관에 들렸다가 내가 쪼로로록 달려간 곳은 바로 이 곳. “Dancing man brewery” 크루즈 셔틀 버스에서 건네 준 종이 지도에 추천 코스로 소개된 곳이었다. 여행은 많이 다녔지만 그다지 계획성이 철저하지 않은 여행자는 그저 구글 지도를 맹신하고 종이 지도에 의존할 뿐이다. 나는 여행 중 브루어리를 찾을 때 구글 지도 창에 브루어리를 치고 거리, 평점을 보고 기분에 따라 느낌에 따라 가고 싶은 곳을 가곤 한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가고 싶을 때는 평이 많고 우수한 곳을 조용히 한잔하고 싶은 날에는 별점은 좋으나 리뷰가 적은 곳을 간다.
“Dancing man brewery” 댄싱맨 브루어리는 2016년에는 사스햄튼 베스트 펍으로 꼽히기도 한 곳으로 자체 양조를 하고 바도 동시에 운영하는 곳이었다. 볕 좋은 날, 사람들이 삼삼오오 야외 테이블 석에 앉아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24시간 언제든 술은 맛있다 생각하는 술꾼이지만 약간 나른한 오후에 야외에서 먹는 술만큼 맛있고 기분 좋게 늘어지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날은 야외와 바 좌석중 어디를 앉을까 고민하다 바에 앉아 멀찌감치 밖을 바라보는 것을 택했다. 메모를 하지 못해 정확히 이름은 모르지만 나의 사랑 ipa. 스타우트, 언필터드 맥주 3잔을 시켰다. 마치 테이스팅 세트 처럼 주루룩 모아 놓고 하나하나 음미 하는데, 하,,,,,,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때의 내가 부럽다. Ipa 본고장 답게 빼어난 맛의 ipa였고 스타우트 역시 굉장히 맛있었는데 내가 시킨 언필터드 맥주가 굉장히 독특한 맛이라 기억에는 제일 많이 남는다. 정제되지않고 감칠 맛이 전혀 없는 몰트 본연의 밍밍한 듯 익숙하지 않고 건강한 맛인데 또 먹다보니 익숙해지는 그런 묘한 맛이었다. 글을 쓰며 구글링을 해보니 주라 위스키가 들어있는 맥주 또한 마실 수 있다고 하니 다음에 꼭 먹어보고 싶다.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탭 리스트였고 브루어리였다.
즐거운 음주의 시간을가지고 터미널까지는 천천히 걸어가니 타이타닉의 이름의 바도 만났다. 타이타닉이라는 이름을 평생 상흔으로 가져가야 할 이 도시의 타이타닉 바에서 맥주 한잔을 더 하고 싶었지만 승선시간이 늦어 나는 발걸음을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맥덕이라면 누구나 꿈꿀 벨기에, 비록 수도인 브뤼셀은 가지 못했지만 크루즈는 브뤼해에 정박했다. 위에서 얘기 했던 수순으로 나는 두 개의 브루어리를 선택했다. 하나는 브뤼헤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맥주이자 브루어리인 zot 비어. 한국말로 옮겨 말할 때 마다 욕하는 기분이 들지만 조트 라고 부르면 된다. zot은 바보라는 뜻으로 병 라벨에는 어릿광대가 그려져 있다. 셔틀에서 내려서 브루어리로 가는 길에는 세계가 전부 초록으로 물든 공원이 있었는데 호빗들이 뛰놀 것 같은 푸르름이었다. 공원 끝에서 시작된 마을은 동화같이 뾰족뾰족 오밀조밀 모여있는 집과 마을을 가로지르는 운하, 물 위로 유유히 헤엄치는 백조들이 어우러져 그림 속에 꺼낸듯한 장면이었다.
아 zot 비어가 대표 맥주이지 브루어리 이름이 아니었.... De HalveMann 드 할브만 브루어리이다. 브루어리에서는 매 시간마다 브루어리 투어를 운영한다. 영어로 진행되며 8유로를 내면 맥주 만드는 공정에 대한 설명과 맥주 한잔을 마시게 해준다.
굉장히 규모가 큰 브루어리를 상상했지만 굉장히 작은 브루어리였고 양조 자체도 소규모로 진행되고 있었다. 영어로 빠르게 진행되는 설명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역사와 전통이 그득그득 묻어난 맥주 공정과 장소들을 둘러보는 것은 즐거웠다.
드 할브만 브루어리의 하이라이트는 옥상이다.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간 옥상에서는 브뤼헤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주황색 지붕이 가득한 아기자기한 브뤼헤의 풍경과 브루어리 마당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정적이지만 경쾌한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투어가 끝나고 시음한 조트 블론드는 시트러스하면서 맛 자체가 가벼운데다 탄산이 강해서인지 블론드 에일이지만 라거 같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 라거처럼 술술 넘어갔다. 조트 블론드 외에도 조트 두벨, 스트라페 헨드릭 트리펠, 스트라페 헨드릭 쿼드루펠 등을 더 마실수 있었지만 다음 코스를 위해 참고 이동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브루고뉴 데스 플랜더스 양조장!breweryBourgogne des Flandres. 이곳 역시 브루어리 투어를 진행한다. 하지만 한 번이면 족하지 더 이상의 설명은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벌컥벌컥 타임!!! 그래서 형형색색의 다른 빛깔과 다른 맛을 지닌 테이스팅 세트를 운하가 보이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 말린 소세지를 안주 삼아 마셨다. 125ml 6종의 14유로. 뭐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이 브루어리의 맥주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건강한 맛"이다. 구수한 보리 맛이 강하게 나면서 자극적이지 않고 본연의 맛이 살아있어 마치 유기농, 오르가닉, 무첨가제 같은 단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분명 테이스팅 노트를 썼는데 대체 어디에 사라졌는지...) 물론 쓰고 도수도 강하고 온갖 플로럴하고 프루티한 맛이 진동하는 자극적인 ipa에 길들여진 내게 벨기에의 맥주는 좀 심심하긴 했지만 새로운 경험치를 주었다. Ipa 조차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은 맛을 낼 수 있다니! 그리고 저 자주빛 맥주는 체리 맥주인데, 아니 유럽인들은 왜 이렇게 체리 맥주를 좋아하는걸까? 헝가리도 그랬고 가는 곳마다 체리 맥주를 왜 이렇게 마셔대는지!
이 집은 사실 맥주 맛집보다는 풍경 맛집으로 기억된다. 자리가 없어 합석한 옆테이블 두 커플의 다정한 대화와 들뜬 얼굴로 배를 타는 관광객과 유럽다운 운치있는 풍경을 안주 삼아 마시는 맥주가 맛이 없을 수는 없다.
크루즈를 오르기 전 터미널 근처 마트에 들러 맥주 쇼핑을 했다. 파랑 시메이를 부산의 한 카페에서 만원도 넘는 돈을 주고 사먹고 홀딱 반해서 여행을 가면 무조건 사먹었었는데 여기서는 고작 1~2유로, 여기는 진정 맥주 천국이다.ㅠㅜ 대표적인 수도원 맥주 외에는 벨기에 했주는 잘 모르지만 저렴한 가격에 가슴이 두근거려 한참을 고르다 요렇게 골랐다. 코끼리를 빼놓을 수 없지. 사실, 크루즈마다 정책은 다르지만 비행기 처럼 음료 주류의 액체는 반입이 안되는데 만약 뺏겨도 하선할 때 받을 수 있으니 배짱으로 샀는데 다행이 잡지 않았다. 그날 밤은 혼자 맥주 파티를 벌였다.
덧> 사진이 왜 이렇게 저질이냐고 물으신다면,,,핸드폰 분실과 카메라 분실로 인해서,,,태블릿으로 찍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