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젠젠 Mar 14. 2021

라다크 레, 창아말레의 창은 맛이 없었다.

"너네가 좋아할 만한 곳에 내가 데려가줄게"


북인도의 작은 티베트라 불리는 라다크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 앉은지 1주일 정도 됐을 때였다. 티베트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움직이며 반 년간 이어온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라다크는 적당했다. 삭막하지만 하늘은 파랗고 어딜가든 살포시 눈이 쌓인 원시의 산이 담긴 풍경도 스피툭 사원에서 여섯명의 스님이 색색의 모래로 만달라를 만드는 모습도 경이로웠지만 무엇보다 가만히 있어도 마음의 동요가 없는 편안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라다크에 머무는 시간 절반을 스피툭에서 보냈고 나머지 절반은 라다크의 주도 레에서 빈둥거리거나 멀지 않은 마을들을 다니곤 했다. 밤에 딱히 할 일이 없는 레에서의 하루는 시내에 단 하나 있는 와인샵에서 사온 술을 마시며 끝나곤 했다. 보통은 인도 맥주, 인도 럼, 인도 포트 와인 등을 먹곤 했는데 그 날도 우리만의 맥주 파티를 벌이려고 하던 중이었다. 그런 우리를 본 게스트하우스 주인 귤멧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지금?"

"응. 지금 당장."

"우리가 사온 맥주는 어쩌고?"

"냉장고에 넣어놔. 조금 이따 마시면 되지."

"대체, 어디를 가는 건데?"

"따라오면 알아."

빠루 게스트하우스는 가족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로 귤멧과 양첸 부부와 두 아들이 함께 살면서 가족처럼 살뜰하게 우리를 챙겨주곤 했다. 우리에게는 한 없이 상냥하지만 두 아들을 대할 때는 세상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소리를 높이던 양첸은 밤낮으로 맛없는 짜이를 챙겨주고 앙상한 몸과는 어울리지 않은 풍성한 수염을 가진 귤멧은 라다크의 숨은 장소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바빴다. 장난기 넘치는 귤멧은 어디를 가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창스파에서 나와 메인 로드 가기 전 길에서 꺾어 작은 터널을 지나고 미로 같은 공간을 이리저리 헤집고 계단을 올라 도착한 곳은 일반 가정집이었다. 우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귤멧에게 물었다.


"귤멧, 여기 정말 좋은 데 맞아?"

"네 친구 집인 거 아냐?"


귤멧은 여유롭고도 거만한 표정을 짓더니 문을 벌컥 열었다. 기고만장한 귤멧의 태도를 보니 겉은 일반적인 집일지언정 그 안에 우리를 놀래킬 무언가가 반드시 있을터였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니 정말 특별할 것이 없는 일반적인 가정집이었다.


"줄레"


라다크어 인사로 우리를 반겨주는 건 라다크 전통옷을 입은 할머니다. 머리를 양갈래로 곱게 딴 할머니에게선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할머니의 볼은 유난히도 빨갰는데 햇볕에 그을린 건지 술기운에 취해서 빨간 건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았다. 서너명의 사람들이 각각 앉아 무언가를 홀짝이고 있다.

"귤멧, 여기는 뭐하는데야?"

"어, 여기는 라다크 전통술, 창을 파는 곳이야."


귤멧은 그제서야 그곳의 정체를 밝혔다.


"너희가 맨날 맥주나 럼만 먹길래 여기를 꼭 소개해주고 싶었어."

"창! 우리 티베트에서 먹어봤었어."


라다크가 2008년 여행의 끝자락이었다면 티베트는 그 여행의 시작이었다. 라싸와 간덴을 거쳐 도착한 시가체에서 타쉬룬포 사원으로 가는 길에 처음 창을 만났다. 전통옷을 입고 입던 할아버지는 페트병에 든 창을 한 컵씩 팔았다. 받아든 창은 언뜻 보면 식혜라고 착각할 정도로 뿌옇고 회색빛을 띄고 걸쭉하지는 않고 맑은 편이다. 맛은 막걸리와 비슷하지만 더 신맛이 강하고 단맛이 없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고산병에 시달리다가 몇 주만에 입에 댄 익숙한 맛은 내게 안정감을 주었었다. 티베트 왕조의 후손이 라다크 왕국을 세운 만큼 티베트와 라다크의 문화적 종교적 언어적 유사성은 뚜렸했지만 술도 같을 줄은 미처 몰랐다.


"아말레, 창 뚱레'


창을 달라는 귤멧의 말에 할머니는 구석에있는 드럼통에서 주전자에 창을 옮겨담고 넓직한 잔에 졸졸 따라 주었다. 그리고 그 위에 버터 한덩이를 넣어주고 보릿가루인 짬바가 담긴 큰 플라스틱 통을 꺼내주었다.


"먼저 짬바를 한 숟갈 퍼서 머금고 창을 마셔봐!"


할머니의 설명에 따라 짬바를 가루약을 털어 넣듯 탈탈 털고 입에 머금었다. 텁텁하고 고와서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꾹 참고 창을 마시려했는데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숨죽이고 tv 프로그램 보듯이 우리를시청하는 모습이 문득 웃겨 파-하고 가루를 뿜어버렸다. 황사가 가득해 시야가 흐려진 델리의 날씨처럼 베이지빛 보릿가루로 공기가 뿌얘졌다. 심호흡을 하며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보릿가루를 입에 고 쉴 틈 없이 창을 밀어넣었다. 시큼한 창에 짬바의 고소함과 버터의 느끼함이 섞여 복합적인 맛이 입 안에서 어우러졌다.

"데낄라를 소금과 레몬이랑 먹듯 창은 버터와 잠빠와 먹는건가요?"

"그렇다기 보다는 신의 가호를 비는 행동이야."

귤멧이 답했다. 창을 한 잔 마시고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에 앉은 현지인들의 테이블에 놓인 술을 살펴보니 재미나게도 전부 옅은 갈색을 띄었다. 창을 마시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하나같이 인도 위스키나 인도 럼을 먹고 있는 거였다. 아저씨가 창아말레(라다키어로 창을 파는 아줌마라는 뜻)에게 위스키를 달라하면 아말레는 찬장에서 술 병을 꺼내 한 잔 따라주었다. 찬장 문을 여니 다양한 술이 줄지어 있었다. 창아말레는 손님에게 술을 한 잔 따르고는 자신의 잔에도 한 잔 채워 넣었다. 창아말레도 창을 마시지 않고 위스키나 럼만을 마셨는데 이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면서 종국에 아말레는 거나하게 취하는 듯 했다. 금주령 시대에나 성행했을 법한 이런 은밀한 스피크이지바가 존재하는 건 아무래도 라다크의 지역적 특성 때문일거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위치한 라다크는 외따로 있는 섬처럼 고립되어 있기에 특유의 문화적 폐쇄성이 있을뿐더러 군사 지역이라 주류 판매 허가를 받기 어려운 곳이다. 레 시내에 '바'라는 이름을 붙이고 술을 파는 곳은 고작 두 곳이며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레스토랑에서도 쉬쉬하며 술을 몰래 팔기 일쑤이다. 창아말레의 집은 비싼 바에도 갈 수 없고 그렇다고 집에서 홀로 술을 먹는 것은 외로운 중년 남자들의 사랑방이었다. 실제로 젊은이들은 와인샵에서 술을 사 삼삼오오 모여 따로 야외에서 술을 마시기에 창아말레 집에 굳이 올 필요가 없고 본 적도 없다. 쓸쓸한 중년들로 채워진 이 공간이 흥미롭고 술을 따르고 나면 아말레가 정중한 손모양과 함께 '플리즈' 라고 정색하며 술을 권유하는 것이 좋아 이 집을 자주 들락거렸다. 앉아서 한 두잔 마시며 아말레와 안부인사와 사소한 수다를 떨다 1리터 페트 병에 창을 한 가득 담아 사오는 것이 늘 수순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문화 경험을 우리만 누리는 게 미안해 여행 중 알게 된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도 귤멧처럼 으쓱으쓱거리며 창아말레네 집에 데려가곤 했다. 현지 가이드를 자청하며 시작한 창 투어는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어내 뿌듯했고 무엇보다 창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티베트와 라다크의 전통주인 창은 보리로 만든 곡주로 결혼식이나 설날 등 큰 축제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먹는 술이다. 막걸리와 비슷한 모양새와 맛 때문인지 창이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했는데 그 방법 역시 막걸리와 유사하다. 고지대의 보리를 씻고 익힌 후 식인다. 보리가 어느정도 식었을 때 도자기 병이나 나무 통으로 옮기고 효모와 물을 섞은 후 빠르면 2~3일, 길면 4~5일 정도 발효하면 그게 바로 창이다. 막걸리와 다른 점은 우리는 발효가 끝나면 쌀을 걸러내고 얻어낸 술을 맑은 부분과 탁한 부분을 섞어먹는 다면 라다크에서는 보리를 걸러내지 않고 윗부분의 술을 옮겨 담아 마신다. 그리고 다시 물을 채워서 숙성해서 먹고 또 다시 숙성하면 그걸 옮겨 담고 또 숙성하고를 반복하며 여러 번 마신다. 그래서 그 색이 옅고 맛이 늘 다르다. 아무래도 먹을 것이 없는 척박한 고산지역에서 효율적으로 오래 술을 먹기 위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우리네 할머니를 똑 닮은 친근한 외모에 '술쟁이'라는 공통분모까지 가진 창아말레의 집을 한 달 넘게 드나들다 보니 친밀함은 당연하거니와 애틋한 마음까지 생겼다. 아말레는 영어는 못했지만 늘 옆에서 새초롬하게 책을 읽던 아말레의 딸이 늘 통역을 해주어서 대화 역시 문제 없이 이뤄졌다. 안경을 쓰고 모범생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그녀는 자기의 독서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못마땅한 듯 늘 퉁명스러웠지만 막상 서로의 말을 옮길때면 열심히였다. 우리가 창아말레의 집을 찾았을 때 언제나 창이 있던건 아니라 창이 없는 날에는 아말레는 미안한하면서도 시무룩한 표정을 오래도록 짓곤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지라 마음이 전혀 상하지도 않았다. 레 시내가 워낙 좁은 탓에 길을 거닐다 보면 창아말레를 자주 만났다. 길을 걷다가 만나기도 했고 레 메인 바자르에서 한 줄로 늘어서 텃밭에서 가꾼 야채들을 파는 아말레들 사이에 섞여 있기도 했다. 길에서 만나는 아말레는 더 반가워 우리는 졸업 후 한참동안 보지 못한 동창을 만나는 것 처럼 매번 화들짝 반기며 소리를 질렀다.


"아말레, 줄레, 깜상이날레, 찌쭈엣레?"


조금 능숙해진 라다키어로 안부를 잔뜩 묻고나면 아말레는 손을 내밀며 유일하게 하는 영어 '플리즈'를 정중하게 말했다. 술을 마시라 권유할 때도 '플리즈'. 집에 놀러올 것을 권유하는 말도 '플리즈'였다. 몇 번이나 꼭 놀러오라고 손을 붙잡고 말하는 통에 우리는 창이 먹고 싶지 않음에도 아말레를 보러도 종종 놀러갔다. 라다크에서 한 달 반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떠나야할 때가 왔다. 우리는 가장 먼저 귤멧과 양첸에게 우리가 떠나는 것을 알리고 스피툭 곰빠 스님 친구들, 현지인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작별의 인사를 건냈다. 가장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창아말레의 집이었다. 그날도 아말레는 얼큰 취해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할머니! 우리 내일 떠나요. 마지막으로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딸의 통역을 통해 이야기를 건내들은 할머니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뒷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바로 라다키 드레스, 곤차였다. 창아말레도 늘 입고 있고 야채를 파는 아말레들도 전부 입는 전통옷으로 짙은 자주빛에 두꺼운 양모로 만든 두루마기이다. 창아말레는 그 옷을 손수 우리에게 입혀 주었다. 할머니들이 입었을 때의 자태가 귀여워 꼭 한 번은 입어보고 싶긴 했었다. J와 나 둘 다 옷을 입고 서로를 마주보고서는 웃음이 빵터졌다.

"야, 너 진짜 안어울린다."

"너도 마찬가지거든. 너 이순신 장군 같아."

곤차를 입은 우리의 모습은 갑옷을 입은 늠름한 이순신 장군을 닮아있었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안어울리다 못해 우스꽝스러웠다. 창아말레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마걀라'라고 칭찬했으나 늘 무표정했던 아말레의 딸까지 함락시켜 깔깔 웃게 만든 걸 보면 얼마나 강력한 장군의 비주얼이었는지 알 수 있다. 라다크를 떠나기 전에 우리에게 소중한 추억을 안겨주려던 창아말레의 마음 씀씀이에 눈물이 핑 돌아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한 우리들은 말 없이 창아말레를 같이 부둥켜 안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창아말레의 눈도 빨개져있었다.

2008년 첫 라다크 여행 이후에 라다크에 매료된 나와 j는 그해 겨울, 그 다음 해 여름을 라다크에서 지내다 2010년 부터 2012년까지는 여름에만 시즌인 레에 자리를 잡고 카페를 운영하기도 하며 라다크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창아말레네 집에도 이따금 갔지만 점점 발길이 뜸해졌던 건 라다크 현지인 친구들이 많아지며 레의 창이 맛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부터이다.

"너네 설마 레에서만 창을 먹어본거야?"

"응. 딱히 구할데가 없으니 레 시내에 있는 창아말레 집에서 밖에 먹어본적 없어."

"아 거기. 레의 창은 맛이 없어. 시골에서 만든 창이 제대로야."

"어떻게 구할 수 있는데?"

"아는 사람 통해 구해 먹는 수 밖에 없지."


시골의 창을 구하고 싶어 수소문한 결과 절친인 초모가 친척이 있는 님무에서 창을 가져다 주었다. 창아말레네서 사온 창이 신맛이 강하고 밍밍한 편이었다면 초모가 가져온 님무 창은 신맛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당도도 적당해 훨씬 맛있었다. 님무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도 보고 놀면서 창도 마음껏 마시며 약간의 일만 도우면 된다는 초모의 꼬심에 넘어간 우리는 님무로 무려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오자마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농활을 온 것처럼 하루종일 빡세게 당근을 캐고 보리를 수확하다가 잠시 짬을 내어 쉴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초모의 사촌 언니는 2리터는 되는 대형 기름통에 창을 가득 담아 내왔다.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마셔요."

초모의 달콤한 말과 달리 당근 노예로 전락한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신선한 살구 안주에 창을 들이켰다. 그 창은 초모가 레로 들고온 것 보다도 유독 더 맛있었다.

"노동 뒤에 마셔서 그런가 지난 번 보다 더 맛있어."

"이거 마추거든. 그러니까 더 맛있을 수 밖에."

"마추가 뭐야?"

"창을 만들 때 가장 최초로 얻는 술이 마추인데 가장 품질이 좋고 맛도 좋아. 이걸 먹을 수 있는 너네는 행운아야"

"오, 진짜? 어쩐지 훨씬 맛있다 했어."

마추는 화이트 와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신맛과 단맛의 조화가 더 고급스럽고 알콜 농도도 쎘다. 님무의 창 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 창들을 그 마을에서 먹을 수 있었는데 그 맛은 비숫한듯 늘 달라 재미있었다. 셰이가 본가인 친구의 집에 놀러가서는 다시 한 번 곤차에 라다크 전통 모자까지 쓰고 창을 마시기도 했다. 뾰족한 모자까지 쓰니 더 지독히 우스꽝스러웠다.

2012년 라다크에서 카페를 정리하고 3년 뒤 한 번 더 라다크를 방문했지만 짧은 일정에 창아말레를 만나지는 못했으니 마지막으로 창아말레를 본 건 무려 9년 전이다. 아말레를 보며 늘 애틋하고 시큰시큰했던 건 늘 술을 달고 사는 모습과 억척스러운 모습, 우리를 예뻐하던 모습이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2020년에 꼭 라다크를 가려했고 창아말레의 소식도 꼭 듣고 싶었으나 코로나 때문에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해외에 나갈 수 없는 동굴의 시간동안 나는 유독 라다크에 대한 그리움에 막걸리를 더욱 더 많이 마셨다. 라다크에서는 막걸리가 그리워 창을 찾았는데 한국에서는 창 생각을 하며 막걸리를 마신다. 막걸리의 신맛이 입 안을 강하게 칠 때면 라다크의 풍경이 눈 앞에서 아른아른거리고 심장이 먹먹해지다가 창아말레네 집에서 도란도란 창을 마시는 장면이 떠오르고 만다. '플리즈' 하며 내게 술을 권유하는 아말레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기만 하다. 다시 라다크를 찾으면 도착하자마자 아말레의 창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 여전히 맛은 없겠지만 그리운 그 맛에 분명히 예전 그 때 처럼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다. 그리고 아말레를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막걸리를 한 병 들고 가서 나누어 먹고싶다. 그 날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내가 너무 늦기 않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