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실험
‘나는 글을 왜 쓸까?’
어떤 의무도, 강요도 없었다.
전공자도, 전문 작가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욕망설
사실 내겐 콤플렉스가 하나 있었다. 바로 글쓰기.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면, 500자 원고지 한 장도 못 채울 정도로 글쓰기 실력은 형편없었다.
삶에 큰 영향은 없었지만, 중요한 순간엔 발목을 잡았다.
가령 이과와 문과를 선택해야 했던 순간, 글쓰기 실력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난 문과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못 쓴다는 이유로, 난 이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설
대학에 들어가서 글쓰기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전공 수업은 무관했지만, 호기심에 신청한 교양 수업이 문제였다.
리포트와 서술형 시험, 모두 글쓰기가 기본이었다. 중간고사 직전이라 취소할 수도 없었다.
워드 프로그램의 빈 문서를 띄어놓으면, 커서만 부지런히 반짝였다.
마치 최면을 거는 듯, ‘포기해, 포기해’라고 속삭였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제출 기한이 다 되어서야 억지로 짜낸 문장만 가득했다.
그 시절의 글쓰기는 ‘생존’, 그 자체였다.
유희설
어느 순간, 글쓰기가 ‘해야 하는 것’에서 ‘하고 싶은 것’으로 변해갔다.
특별한 계기?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억지로 짜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조금씩 스며들었던 감각은 남았다.
그 감각으로 신청한 <문학의 이해>. 아마도 이 수업은 내게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 꾸준히 책을 읽기 시작했고, 메모와 짧은 글쓰기로 펜을 잡았다.
그리고 맞이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글쓰기 시험.
기말고사 날, B4 사이즈의 갱지 한 장이 내게 주어졌다.
상단엔 학과, 학번, 이름을 적는 칸만 있었고, 나머지 빈 공간은 오직 내 몫이었다.
담당 교수는 칠판에 단 한 문제를 적었다.
“분량은 자유다.”
그 순간, 글쓰기 첫 도전은 시작되었다.
쌓이고 쌓인 단어와 문장.
글은 내게 두 가지 다른 맛을 주었다.
첫 번째 글맛, 읽기.
새하얀 종이, 그 위에 검은 잉크가 내린다.
자국은 뭉쳐 글자가 되고, 글자는 문장이 된다.
문장은 문단이 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그린다.
나는 숨죽여 그 흔적을 쫓는다.
때로는 붙잡히고, 때로는 달아난다.
붙잡힌 문장 하나가 내 눈길을 지나, 내면을 두드린다.
‘똑똑’.
뇌세포 속 하나의 글이 복제되는 순간, 나의 의미가 시작된다.
의미는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스며든다.
머릿속엔 물음표가 출렁이고,
가슴속엔 느낌표가 일렁인다.
그 과정이 독서다.
두 번째 글맛, 쓰기.
주름진 세포, 그 안에 갇힌 생각이 숨쉰다.
그 세포 덩이가 모여 지각이 되고, 지각은 의식이 된다.
의식은 인식이 되어 하나의 철학을 세운다.
나는 신중히 그 관념들을 압착한다.
때로는 굳어지고, 때로는 흩어진다.
굳어진 생각 하나가 내 머리를 떠나, 세상을 두드린다.
‘똑똑’.
종이 속 하나의 철학이 복제되는 순간, 나의 관점이 정제된다.
관점은 머물지 않고, 타자에게 스며든다.
머릿속엔 느낌표가 꿈틀대고,
가슴속엔 물음표가 피어난다.
그 과정이 글쓰기다.
글은 내 삶의 한 조각이 되었고,
삶은 조금씩 글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답한다.
‘나는 글을 왜 쓸까?’
나는 쓰기 위해 살아가고, 살아가기 위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