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메모 #2: "미묘한 메모의 묘미"
크림색 수첩 앞부분에 있는 월별 메모 페이지들에서 11월을 찾아가 이 달에 꼭 해야 한다고 연초에 적어놓은 목록을 확인한다. 월동 준비의 시작으로 수도계량기 동파방지 채비로부터 2026년도 가계부와 수첩 준비까지 예닐곱 개의 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 어느새 앞의 열 장에 적었던 메모들 위에 할 일을 마쳤다는 표시의 빨간 줄이 줄줄이 그어져 있고 이제 해가 가기 전에 마쳐야 할 일 목록이 딱 두 장 남아 있다.
매년 365일에 걸쳐 월별로 꼭 해야 하는 굵직굵직한 일들을 별 차질 없이 실행하고 처리해서 완료 표시를 서슴없이 그을 때 가슴 뿌듯한 충만함을 느끼고 기분이 상쾌하다.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다. 완료한 것과 미완료한 것 옆에 간략하게 메모를 해둔다. 기억하기 위해서인데, 수 십 권의 수첩을 쌓아놓으니 살아온 세월의 나이테를 목격하는 것 같다. 어른으로서의 내 삶의 역사의 단면을 목도하는 느낌이 든다.
"미묘한 메모의 묘미"
2. 메모의 도구
2-1. 메모 도구는 신체의 연장이다. (p.38)
-> 제퍼의 메모:
Bingo! 언젠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다이어리나 수첩은 시시때때로 생기는 내 생각과 감정들을, 수많은 나와 관련된 사실과 일을 일목요연하게 체계적으로 담아놓은 뇌 같다고. 그것은 곧 나 자신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종이에서부터 타자기, 노트북, 스마트폰으로 변모된 기록 도구들을 다루는 손가락의 놀림은 현란하면서도 섬세하게 발달했다. 앞서 작가의 표현대로 일관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은 우리의 뇌에서 불쑥불쑥 들쭉날쭉 생겨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생각 조각들은 손가락 움직임을 통해 문자, 기호, 표, 그림 등의 형태로 메모 도구에 전달된다. 그 메모들은 순간 포착되어 그들만의 포지션을 차지하며 머리에서 뻗어 나와 손끝에 닿아 있는 도구에 이르는, 위치가 달라진 뇌 기능을 하게 된다. 어찌 보면 또 다른 '나'일 수도 있다.
<메모 도구 - 타자기>
- 철컥, 드르륵, 툭, 타닥 하는 기계 소리가 묘하게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p.44)
- 타자기 소리는 총소리처럼 공격적이지만 진실을 향해 달려간다. (p.44)
-> 제퍼의 메모:
데스크톱 컴퓨터를 사용하기 전 타자기를 만져본 기억이 있다. 그것으로 어떤 작업이나 일을 한 건 아니고 호기심에 재미 삼아 두들겨본 경험이 있다. 철컥, 드르륵, 툭, 타닥 기계음이 주는 편안함의 정체를 나도 비슷하게 안다. 내가 꾸준히 하고 있는 영어 글 필사 때 노트북의 키보드 감촉과 소리로부터 느끼는 감정이 떠오른다. 신문사 편집실에 울리는 진실을 향해 공격적으로 달려가는 타자기 소리라니! 사명을 다하는 신문 기자의 모습이 한눈에 그려지는 매우 시각적인 멋진 표현이다.
고집스럽게도 일상에서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게 몇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가계부, 수첩, 다이어리, 메모지에 대한 부심이다. 크기, 색상, 디자인, 모양, 속지 구성 등 외적인 디테일에 세심하고 맘에 쏙 드는 걸 득템 하면 소름 돋게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성실한 생활인으로 정성껏 손으로 채워나가는 순간들을 의미 있게 여긴다. 좋아서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구속하는 면도 없지 않다. 즐거운 구속이라고 생각한다. 무한한 자유보다는 약간의 구속, 불편함이 있는 환경에서 얻는 쾌감이 있다. 얼마간의 불편과 수고를 감수해야 하지만 아날로그 스타일에는 분명 포기하기엔 아까운 낭만이 흐른다.
편리하고 유용한 기능이 있는 메모 앱들이 많고, 날로 그 기능들이 업그레이드되고 있어 궁금함에 간혹 기웃거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 부심은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다. 아날로그 방식은 아직 마냥 재미있고 흥미로우며, 마음을 사로잡는 도구들이 많고 많아 일탈할 틈이 없을 것 같다. 예외적으로 설거지하다가, 청소하다가, 요리하다가, 장 보다가 뜬금없이 긴장하게 만드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휴대폰 카카오톡 메신저 서비스의 나와의 채팅 기능을 이용한다. 떠오른 생각이 달아날까 불안해서 하던 일 도중에 휴대폰을 꺼내 부랴부랴 입력하는 습관이 있다. 그때그때 생각의 조각들을 부지런히 모아두는 것이다. 언젠가 한 푼 두 푼 모은 동전 같은 생각들이 아주 요긴하게 쓰일 거라는 바람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 확신에 찬 생각만 메모로 쓰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불확실하고 불완전해서 메모가 필요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메모를 써 놓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머릿속에서 흐릿한 안개로 존재하던 어떤 생각들이 실물이 되어 현실의 평면 속에 놓이는 순간, 생명을 얻게 된다. (p.69)
-> 제퍼의 메모:
이마를 탁 치고 싶을 만큼 기가 막힌 생각이나 멋진 문장이 떠오르면 그것이 날아가지 않게 어딘가에 가둬두고 싶지 않은가요! 그래서 수첩이든, 카카오톡 나에게 채팅하기든, 화이트보드든, 메모 앱이든 재빨리 적고 나면 안심이 된다. 메모해 둔 생각들을 다시 보면 "음, 멋지네." "이때 꽤 쓸만한 생각을 했네." 하는 문장들도 있고,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공허한 문장들도 있고, 또 그대로 버려질 위기에 있는 것들도 있다. 머릿속에서 무형의 생각을 아무리 다듬어도 유형의 문자를 빌려 밖으로 내놓아야 작가의 말처럼 그제야 생명을 얻는 것 같다. 생명을 얻고 나면 그 생각들의 주체에 의해 다듬어지고 엮어지는 유기적 작용이 이루어지며 끝내 어떤 메시지를 담은 글이나 이야기로 재탄생하여 생명력을 이어간다. 때론 그 자체로 불멸의 생명력을 지니기도 한다. 세상에 나오고 못 나오고의 여부가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3. 메모의 방법들: 추천하는 10가지 메모법
작은 수첩 / 카드 / 표 / 마크다운 / 마인드맵
사진 / 매일 1초 영상 / 벽 / 목적에 따라 다른 방식 / 지도
- 언제나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기능이다. ~ 수첩을 열쇠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수첩은 생각의 문을 열어 주는 열쇠다.(p.80)
> 제퍼의 메모:
작가는 10가지 메모법을 추천하고 있는데, 작은 수첩에 메모하기에 대해 외출 시 열쇠, 지갑, 휴대폰과 함께 수첩을 챙길 것을 권한다.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것은 중요한 것인데, 생각이 많고 무언가 적는 것이 중요한 이들에게 수첩은 열쇠, 지갑, 휴대폰과 마찬가지로 늘 챙겨야 하는 소지품이다. 자신의 취향이 묻어나는 수첩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언제 어디서든 머릿속에 와글거리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을 때 '나의 수첩'을 열어 펜을 들면 뭉게구름처럼 떠다니던 생각들이 기다렸다는 듯 차분하게 또박또박 걸어 나온다. 그러니 수첩은 생각의 문을 열어 주는 열쇠와 다름이 없다는 말에 안성맞춤이라고 엄지척한다.
-> 제퍼의 메모:
예상했던 대로 작가는 지도에 하는 메모법을 추천하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김중혁 작가의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소설에 지도 이야기가 나온다. 내게 매우 인상적인 이야기였기에 지금 이 책 "미묘한 메모의 묘미"를 본 순간 분명 지도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역시 그랬다. 예상이 틀리지 않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도는 설렘을 부른다. 어디론가 떠남을 상상하게 된다. 지도에 하는 메모가 동경, 계획, 추억으로 이어져 매듭을 짓듯 동그라미를 완성해 나가고 그런 동그라미들이 하나 둘 늘어날수록 그 지도의 주인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며 가치 있는 경험과 추억이 빼곡히 들어차는 자신만의 삶의 지도를 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메모를 하는 목적은 다양하며 메모를 하는 방식도 사용할 수 있는 메모 도구들도 다양하다. 무엇이 되었든 메모를 하는 행위는 살아가는 순간에 집중하고 어떤 의미를 포착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간순간의 점들이 모이고 그 점들을 이으면 의미와 방향을 나타내는 선이 된다. 그것은 곧 내가 걷고 있는 인생길을 보여준다. 걸어온 자취와 걸어갈 곳을 동시에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메모의 힘을 간과할 수 없고, 메모의 낭만을 포기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