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난 영어를 읽는다

나를 찾는 모닝 리츄얼

by 제퍼

시곗바늘이 11을 향해 가고 있다. 순간 마음이 다급해진다. 발은 종종거리고, 분주해진 손놀림과 거듭 벽시계를 향하는 시선으로 주변의 아침 공기가 달구어지기 시작한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는 25년 경력 주부의 움직임은 날렵하고 나름 체계적이어서, 11시가 되기 직전 일사천리로 할 일이 마쳐진 집안은 손끝에서 피어난 정갈함으로 말끔하게 단장되었다. 꼼꼼하게 공간 구석구석의 상태를 확인한 후 그날의 기분에 따라 컵을 고르고, 커피를 만들어, 주방 식탁 한편에 마련한 내 자리에 앉는다. 가슴이 살짝궁 떨린다. 수 백 번 아니 수 천 번일 텐데도 매번 설렌다. 그럴 때 비로소 오롯이 내가 푸릇푸릇 살아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오전 11시, 드디어 시작한다. '나를 찾아가는 리츄얼'이라 거창하게 되뇌면서 말이다. 식탁 모서리에 두었던 글로시한 라임색 표지의 책을 들어 책갈피를 꽂아둔 곳을 펼친다. 영어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절반 가까이 읽은 페이지가 보인다. 울긋불긋 색펜 줄과 글씨들이 검은 활자들 주위를 곳곳에서 에워싸고 있다. 장렬한 전투가 있었던 전장의 훈장이랄까 상처랄까, 옅은 베이지색 재생 종이 페이지들은 어떤 파란만장한 사연을 담고 있는 저마다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오늘도 어김없이 두 시간 꽉 채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싶기 때문에 민첩하게 행동을 이어간다. 분량을 확인하고, 펜을 꺼내고, 오른쪽 대각선에 김이 오르는 커피 잔을 받침 위에 놓고, 그리고 안경을 벗어 왼쪽 대각선에 둔다. 이제는 벗어야 글씨가 잘 보이는 노안이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읽은 소설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려 정리한 후, 오늘의 첫 줄을 시작한다.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한다. 처음엔 다소 밋밋하게 발성되다가 서서히 목소리에 탄력이 생긴다. 습관화된 크기와 톤에 도달한 목소리는 자연스레 보이지 않는 공간의 길을 따라 흐른다. 심장이 부풀어 오른다. 커피 향과 어우러져 적정한 속도의 리드미컬한 영어 소리가 내 몸의 세포들을 자극한다. 소리가 닿을 때 그것들은 전율한다. 마침내 나를 다시 찾았다는 안도와 희열이 교차한다. 보석 같은 이 시간을 또 만난 건 기적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난 잘 쓰인 영어 글을 읽는 게 좋다. 특히 매력 넘치는 영어 소설을 소리 내어 읽는 걸 무척 좋아한다. 아마 사랑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Times New Roman 글자체로 타이핑된 영어 단어들이 작가가 절묘하게 유기적으로 엮어 놓은 이야기 그물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완성된 문장들을 내 입에 담아 머금었다가 내놓을 때의 감탄은 형언하기 어렵다. 군더더기 없이 존재의 이유가 명백한 단어, 구, 절, 문장으로 완결된 단락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머릿속에 그리며 소리 내어 음미하는 행위는 신성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 작가는 얼마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인 건가! 예리한 관찰은 물론이고 그녀 또는 그의 상상력의 끝은 어디쯤일까?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가다 보면 그런 멋스러운 문장들이 내 목소리를 타고 실타래가 스르륵 풀리듯 유려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순간 감지할 때가 있다. 실오라기 하나의 걸림도 없이 아주 매끄럽고 부드럽게 혀가 움직이는 걸 체감할 때 황홀경이 따로 없다. 몸의 근육들이 말랑말랑 해지며 내면의 비움과 채움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경험을 한다.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다. 맛과 멋에 취해 매일 아침 영어를 소리 내어 읽는다. 거를 이유가 없다.



1. 일단 빠르게 눈으로 읽는다.

2. 다음으로 소리 내어 천천히 내용을 이해하며 읽는다.

3. 처음 보는 단어나 표현, 모르는 단어에 밑줄을 치며 다시 소리 내어 읽는다.

4. 밑줄 친 것들을 사전에서 검색하여 밑줄 아래 뜻을 적으면서 다시 읽는다.

5. 처음부터 읽으면서 밑줄 친 것들 중 머릿속에 그림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거나, 멋진 표현 또는 문장과 외워두면 좋을 것 같은 단어와 표현들을 노트에 적는다.


이는 단편 소설 하나를 읽는 나의 순서다. 최소 다섯 번 읽는다. 소리 내어서는 네 번이다. 하루 두 시간으로는 그 과정을 다 마치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작품 이해측면에서도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날 가능한 데까지 꼼꼼히 읽는 걸 목표로 한다. 이 행위를 마치고 나면 잔잔한, 좀 더 정직하게, 반복적인 주부의 할 일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굳이 나눠보자면 나의 하루는 이 모닝 리츄얼을 기점으로 시작되기도 하고 마무리되기도 한다. 시작의 기준으로 보면 영어 소리 내어 읽기는 오후 시간을 어제보다 쪼끔 더 나은 나로 살 수 있는 마중물이 되고, 마무리의 기준으로 보면 어제 하루를 잘 살았음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매일 오전 영어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나의 새로운 하루를 나답게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고요한 열정 같은 거다. 관계에서 필요한 사회적 역할 말고 myself 오로지 나로 하루의 일부를 채워감으로써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추구하는 성스러운 리츄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