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소리 내어 읽기
언제 어떤 이유 때문이었지? 영어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한 것에 대해 기억해 보자.
세 번의 임신과 세 번의 자연 유산으로 인해 결혼 생활 일부분이 침울했었던 시간을 잘 견디고 네 번째는 자연분만으로 출산에 대한 문제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다. 산후조리를 끝내고 맞이한 17년 전, 겨울이 곧 오기 전 싸늘한 늦가을 어느 평일 오전, 나는 하얀 아기용 침대에서 쌕쌕 잠든 어린 새 생명을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혼한 지 8년 만에 엄마가 되었는데 그 사실이 믿겼다가 아니었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기다리던 아이라 마냥 어여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떤 때는 한없이 예쁘고 신기하고 감사하다가, 또 어떤 때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기도 하고 불안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는 이제부터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다를 것이고 그로 인해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이 달라져야 함을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가보고 싶었던 상상 속의 엄마의 길인데 가본 적이 없어 현실에서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되기 위한 연습 없이 실전이 닥친 것이다. 육아가 처음인 이들처럼 그때의 나 역시 모든 게 낯설고 어설픈 왕초보 엄마의 전형이었다.
아기의 먹고 자는 시간에 맞추어 나의 모든 일을 조정하며 새로운 하루하루를 6개월쯤 보내고 있었다. 너무 조용한 환경에서 키우면 아기의 성격이 예민해질 수 있다는 것을 육아서에서 배우고 낮에는 대부분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음악 소리에 아기를 잠재워 침대에 누이면 두 시간 이상 깊은 잠을 잤다. 그 사이에 난 사부작사부작 집안 일하고 시간이 남으면 주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기가 잠든 밤에 하는 잡(Job)으로서 내 일을 조금씩 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 뉴스 프로그램이 보고 싶어 채널을 돌렸는데 내용을 제대로 듣고 싶어 볼륨을 좀 높였다. 아기가 깰까 봐 방 안을 살금살금 들여다보았는데 오호! 2~30분가량 시청해도 깨는 기색이 없지 뭔가. 음악 소리 크기와 비슷하게 흘러나오는 앵커의 목소리가 수면을 방해할 정도의 잡음이 아니었는지 아기는 잘도 잤다. 그러다 문득 꾀가 났다. 딱딱한 내용의 일을 하다가 머리 식힐 때 소설을 읽는 습관이 있는데 뉴스 소리도 괜찮았으니 소설도 소리 내어 읽어볼까 하고 시도를 했다. 방 안에서 들으면 음악 소리를 배경으로 엄마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정도였는지 이번에도 깨거나 뒤척이는 눈치 없이 아기는 잘도 잤다. 빙고!
그때부터 아기가 낮잠 자는 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우선 집안일부터 끝내고 내 일을 조금 할 수 있으면 하고 그 일을 하면 소설 읽을 시간이 없겠다 싶으면 일은 집중이 더 잘 되는 밤 시간에 하기로 하고 남은 시간에 영어 글을 소리 내어 읽는 루틴이 생겼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든 쫓기며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덜 해졌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할 시간과 종류를 선택해야 했던 것으로부터의 스트레스가 조금씩 해소되는 걸 느꼈다. 생각지 않았던 깜짝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할까. 감정과 에너지가 무기력하게 소모되고 있는 것 같은 일방적인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며 심리적으로 안정도 되고 선택의 여지없이 해야 하는 살림과 육아에 대해서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영어 소리 내어 읽기는 예상치 못했던 보상과 삶의 기술을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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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시간, 생각, 행동의 자유를 방해받을 때 불안하고 위기의식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 자유 의지를 발휘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알게 모르게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늘 달뜬 체로 부산하게 시간을 보냈었다. 그 원인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아기의 출산이어도 달라진 내 현실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다. 육아, 살림, 일에 매몰된 생활은 나를 종종 무기력하고 허탈하게 했다.
문득 "소리 내 읽어볼까" 떠오른 생각을 그냥 시도한 게 다운된 기분도 업되고 하던 일들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줄고 상황에 대해 탄력적으로 대처하는 요령이 생겼다. 작은 하나를 해봤을 뿐인데 그 하나로 일상에 윤기가 돌았다. 이어질 긴 육아와 양육의 길을 쉬엄쉬엄 그러면서도 부단히 갈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 생긴 것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꽤 절묘한 필연이 작용한 'Just Do It'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