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Do It'이 가져다준 변화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물에 물감 방울을 떨어뜨리면 물감 색이 수면에 아지랑이처럼 퍼진다. 곧이어 그릇 안의 무색의 물은 떨어진 물감 색으로 물들어 색깔 있는 물이 된다. 16년 전 초여름 내 인생에도 물감 한 방울이 떨어졌다. 무슨 색이었지? 곰곰이 생각하니 초보 육아맘의 마음에 드리워졌던 뿌연 막을 걷고 맑고 투명한 시야를 보여주는 색깔이지 않았을까. 어떤 색이든 흡수하는 하얀색! 영어 읽기는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는 하얀 도화지를 펼쳐주었다.
아기 낮잠 타임 동안 8절지 크기의 하얀 도화지만큼의 시간을 떼어내서 읽을 책을 마주한 첫 순간의 감흥이 또렷이 생각난다. "이게 뭐라고. 따지고 보면 뭐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신박한 아이디어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설레나?"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고는 내게는 그 특유의 가벼운 중량감으로 독서 의욕을 더 지피는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책과 그것을 마주한 나, 공간을 조용히 감싸는 잔잔한 음악, 그 소리를 타고 꿈나라를 여행 중인 생후 6개월 아들, 초여름 오전의 햇살이 환하게 들어찬 집 안을 두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훑으며 기억에 담았다. 한참을 그랬다. 책표지를 얼른 열지 못했다. 떨렸다. 펼치는 순간부터 그것에 빨려 들어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를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초반에는 30분 정도 영어 소설 읽기를 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몇 시간 한 것 같은 몰입감을 느꼈다. 읽는 순간부터 오감이 촉촉하게 자극되고 머리가 맑아지며 축적된 피로가 가시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차츰 시간이 늘어났다. 누런 종이 위에 탁-탁-타다닥 타이핑된 Times New Roman 활자들이 어서 읽어달라고 아우성치는 환상이 일었다. 눈으로 그 아우성치는 글자들을 빨아들이고 목소리로 뱉어냈다. 억양을 타고 리드미컬하게 흘러나오는 영어 문장들은 맛깔스러웠다.
단순히 읽고 이해하는 걸로는 모자란 것도 같고 아쉽기도 했다. 자연스레 밑줄을 치기 시작하고, 사전을 꼼꼼히 찾고, 메모하고, 형광펜으로 강조하고 싶어지고, 노트에 정리하는 순서가 차례로 덧붙여졌다. 그 맛을 조금 더 많이 진하게 느끼고 싶은 거였다. 1시간, 1시간 반, 2시간으로 읽기 시간이 늘어났다. 그럴수록 몰입 정도와 만족감은 시간에 비례했다.
시간이 커지는 만큼 애정도 자라났다. 어느 순간에 밑줄용, 하이라이트용 펜을 색색이 구비하여 나름 깔 맞춤을 해서 사용하고, 휴대용 수첩과 노트는 물론이고 다양한 크기의 포스트잇 등 문구류를 사는 취미가 생겼다. 이게 또 얼마나 재미가 쏠쏠한지! 소소하고 부수적인 것이지만 읽고 쓰는 주된 것의 의미와 가치를 배가하였고, 이제는 주와 부의 행위가 일체가 되어 중단하거나 분리할 수 없는 모닝 리츄얼 셋(set)으로 되었다.
때론 정말로 하얀 도화지에 종류와 색이 다른 도구들을 사용하여 작업하는 아티스트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눈뜨면 그 의식(ritual)을 그날 나의 첫 생각 묶음에 넣었고, 오전 11시 즈음을 겉으로는 태연하게 그러나 내심 안달하며 기다렸고, 의식을 시작하면 스펀지처럼 무섭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고 나면 크고 재주가 하나씩 느는 아기와 함께 엄마로서의 모습은 모닝 리츄얼 덕에 건강하게 뿌리를 내려갔다. 그리고 180도 달라진 삶에서 나도 무언가를 피워낼 수 있을 것 같은 동력이 생겼다.
세 번의 유산으로도 모자라 임신 기간 내내 누워있어야 했던 (당시 너무 혹독하다고 눈물을 삼켰다. 출산 전까지 계속된 입덧, 식사와 화장실 볼 일 외에는 무조건 누워있고 좋은 음악, 좋은 책, 좋은 생각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태교의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네 번째 임신이자 내 생애 마지막 임신을 무사히 자연 분만으로 마무리 짓고 산후조리 후, 10달 가까이 누워있어서 근육들이 다 빠져 후들거리는 팔다리로 눈앞에 닥친 본격적인 실전 육아를 하자니 허구한 날 눈물이 앞을 가렸었다. 아기가 곤히 잠들었을 때나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는 깨끗한 눈망울을 볼 때면 어린 생명을 잘 돌보기는커녕 나 자신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두려움에 짓눌려 무력감에 빠지곤 했던 그 시절의 내게 영어 소리 내 읽기는 어느 날 문득 내 맘속에 민들레 홀씨가 되어 날아들어와 생명의 씨앗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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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아든 홀씨가 내려앉은 그곳에 질긴 생명력이 움트기 시작한다. 움츠렸던 서툰 엄마가 어린 아들과의 새로운 둥지를 튼다. 아들을 위해 튼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리려고 그 엄마는 날마다 매력적인 글자들이 박혀 있는 책을 나지막이 읽는다. 그 소리로 악을 내쫓고 선을 부르는 듯 매일 오전 11시 경건한 리듬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