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바라기 소년

마음의 지도를 따라 떠나는 공룡 보러 삼만리

by 제퍼

손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 수 있기 시작하면서 아들은 눈에 띄게 동물을 그리고 종이로 접기를 좋아했다. 스케치북, A4용지, 포장지 뒷면, 거실 벽 화이트보드 등에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그려댔다. 동물 그림책을 보고 또 봤다. 책 속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동물 그림을 뚫어져라 보았다. 책의 동물 형상을 머릿속에 자신만의 포인트로 사진 찍어 두었다가 특정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여 그렸다.


그러다 평면적인 책과 그림 너머로 호기심이 커지며 종이 접기로 활동이 확장되었다. 입체적인 것을 원했던 것이다. 피규어 장난감은 아이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완전 새로운 차원의 놀잇감이었다. 종이 접기로 느끼는 오감 만족과는 차원이 다른 모양이었다. 실물에 가깝도록 정교하게 제작된 놀잇감으로 일 다역으로 흡사 영화의 장면을 연출하는 놀이에 푹 빠졌다. 얼마 후에는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로 직접 만들고 싶어 해서 점토 놀이를 시작했다. 크레파스, 색연필, 색종이, 점토 엄청나게 사들였다.


아들이 특히 좋아한 동물은 드래곤, 독수리, 그리고 공룡이었다. 그중에서도 공룡은, 천하무적이었다. 아이에게는 어떤 동물의 왕도 공룡에 대적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아이들에게 공룡은 영원한 워너비 대상인 것 같다. 다른 많은 동물들은 동물원에 가면 볼 수 있어 그들의 생김새, 소리 또는 울음, 냄새, 어떤 특징적인 행동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공룡은 다르다. 지구상에서 멸종되었으니 세계 어디를 가도 실재를 구경조차 불가능하다. 보고 싶은 욕구가 해소되는 기회, 가능성이 제로니까 공룡에 대한 아이의 호기심이 커졌다.


그즈음 아이 앞에 등장한다. 영화 쥐라기 공원과 자연사박물관! 타이밍이 절묘했다. 쥐라기 공원 시리즈 1, 2, 3편을 보고 아이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영화 속에서 살아 있어 포효하는 공룡이 어딘가에 진짜 있을 것만 같다고 여기는 듯했다. 공룡에 대한 관심과 갈증이 더욱 증폭되었다.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픈 최선책으로 박물관 투어를 시작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필두로 안면도, 대전, 해남, 고성 등 전국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은 모조리 다녔다. 이때는 남편이 합세하여 환상의 트리오가 되어 주말이면 우리는 떠났다. 먼 거리를 갈 때는 새벽에 출발하곤 했는데 아이는 깊은 꿈나라에 있다가도 공룡 보러 가자 한마디에 기꺼이 잠을 깨고 어두운 새벽길에 투정 없이 나서곤 했다. 공룡이 뭐길래!


공룡이 뭐였냐면!

아이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부풀고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게 한 시작점이었다. 공룡이 멸종되었다는 것은 곧 공룡을 책이나 영화, 박물관에 전시된 모형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사실은 아이에게 공룡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역사와 미래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공룡은 왜 멸종했지? 멸종을 부른 지각 변동은 지구가 어떻게 되었다는 거지? 빙하기를 지나면서 얼어서 죽지 않은 공룡 유전자는 진짜 없나? 매머드 유전자를 복원하는 연구가 성공할까? 꼬리를 물고 아이는 궁금해했고 멈출 줄 모르고 찾았다.


그 과정을 통해 아이는 장차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태도를 스스로 배웠다. 호기심, 탐구하는 자세, 집념, 기다림, 이해와 타협... 등 공룡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중요한 삶의 기술들을 종합선물세트로 묶어 날랐다. 순수한 이유로 무언가에 흠뻑 빠질 수 있다는 건 귀한 거다. 깨끗한 어린 영혼에게는 축복이다. 스스로 세상을 살아나갈 저력을 기르는 것이니까. 빨아 들일 것같이 몰입할 때 아이의 조용히 타오르는 눈빛이 포착될 때면 손목에 소름이 돋았다. 순수한 열정이란 저런 거다. 그 단어가 생생하게 숨 쉬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놀랍고, 부러웠다. 나는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유아기의 아이의 열정은 훗날(초등 고학년 이후) 생명과학 분야에 몸담고 싶은 소망으로 이어진다. 아들의 공룡에 대한 관심은 이후로 조금도 시들지 않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초등 고학년 어느 날, 아들은 뜯어낸 스프링 노트 앞뒤에 연필로 빼곡하게 뭔가를 적고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을 보관할 파일을 달라고 말했다. 무엇을 적은 건지, 누가 적은 건지 궁금했지만 일단 탄탄한 파일을 하나 찾아 건넸다. 아들은 마치 소중한 보물을 넣듯 파일을 벌려 조심스럽게 그 노트 한 장을 끼워 넣었다. 그제야 작은 안도의 한숨 비슷한 걸 내쉬며 물끄러미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엄마, 이거 학교 도서관 과학잡지에서 본 건데, 빙하기 이후 보존된 매머드 유전자를 복원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대. 이 연구가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 공룡 것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난 그날 아이의 찐한 진심을 온몸으로 전해받았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세포 하나하나에 그의 마음이 박혔다.


아마도 그날 이후로 아들은 유전자 관련 자료와 연구에 대한 촉각을 세우고 관심을 더 키워나갔을 거라고 짐작한다. •고등학교 자율적인 수행평가나 동아리 활동 분야는 늘 세포, 유전자, 동물과 연관된 생명과학이었다. 특히 실험 과학을 선호한다. 관련 책과 잡지를 흥미롭게 읽으며 읽고 배운 것을 실험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입하고 재미있어한다. 그래서 고등학교 선택 시 과학 실험실이 훌륭한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중학교 3학년 때 관내 고등학교를 탐방하던 날 현관에 들어서며 운동화를 채 벗기도 전에 자신이 마음을 정한 학교에 대한 자랑을 들어달라고 내게 마구 늘어놓던 때의 아들의 상기된 두 볼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때에도 당시를 떠올리는 지금도 내 가슴은 뜨겁다. 아기 때 공룡에서 비롯된 호기심은 알고 싶은 욕구를 낳았고, 찾고 탐구하여 가지를 치며 뻗어 나가고 있는 아들의 열정이 가슴 저리게 아름답다. 스스로 치열하고 진지한 고민 속으로 뛰어드는 10대의 순수함이 너무 귀엽고 어여쁘다. 순수한 열정에 흠뻑 빠지는 그의 순수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의 순수와 열정이 나를 일깨운다. 엄마로서 나 자신으로서 잘 살고 있는 건가? 그를 보며 나를 되돌아보고 내 역할에, 나 자신에게 담금질하도록 스스로 바로 잡는 기회를 얻는다. 나이를 막론하고 자신의 꿈에 매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음이 분명하다. 아들이 공룡 다음엔 무엇에 흠뻑 빠질지, 그래서 자신의 삶의 그물을 어떻게 엮어 탄탄해질지 무척 궁금한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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