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사랑

by 권병화

1. 사람들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물론 죽음이 인생의 끝인지 아닌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나'라는 영혼이 살아있는 이번 생은 오직 한 번뿐이 경험할 수 없다. 대신에 모든 생명체들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일들을 한다. 그리고 생명들이 세상을 맞이하기 전까지 그들의 안식처에는 바로 '어머니'들이 있다.


2. 영화 ROMA에서 멕시코의 한 가정의 가정주부인 클레오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함께 기도해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클레오 또한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넓은 집에 가정주부 둘이 모든 일을 하기엔 힘이 들고 밤엔 주인 어머니 눈치 보랴 전깃불도 키지 못하고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아이들 중 가장 어린 페페와 함께 옥상에서 누워 둘은 죽어있는 연기를 한다. 이 시퀀스에서 클레오의 표정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편하고 정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클레오는 말한다. '죽어있는 것도 나쁘지 않네'라고.


3. 영화 ROMA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존재를, 그리고 '삶'과 '죽음'을 교차하면서 비교하고 강조한다. 아이들의 어머니 소피아와 가정주부 클레오는 사랑했던 사람의 무책임함에 의해 삶이 엉망이 된다. 소피아의 남편은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대놓고 외도까지 저지른다. 다른 동네로 도망간 것도 아닌 같은 동네에서 여전히 살면서 말이다. 클레오의 남자 친구 페르민은 클레오에게 임신소식을 듣자마자 도망간다. ROMA에서 남편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치졸하고 옹졸하며 무책임하다. 자신들의 책임은 내팽겨 쳐버린 채 자기만을 위한 삶을 즐긴다. 남은 책임들은 모두 사랑했던 사람에게 떠넘기고 말이다. 남겨져 버린 모든 부담과 짐들, 그리고 아이들은 오롯이 '어머니'들의 몫이 돼버린다. 클레오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된다는 것에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그녀는 혼자가 돼버린다. 아니 그녀와 아이와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소피아는 술과 눈물로 슬픔을 삭힌다. 스스로를 망쳐가면서 삶은 피폐해지고 음주운전을 하면서 자신의 목숨마저 소중히 다루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좁은 차고에 엉망으로 주차하면서 생긴 차의 스크래치는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소피아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딛고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녀의 옆에 있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일어서려 한다. 클레오는 용기를 내어 파르민을 찾아간다. 멕시코 변두리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보러 간다. 하지만 그를 만나 돌아오는 말은 다시 자신과 아이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 클레오는 그렇게 체념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아직 살아가야 한다.



4. 어느덧 클레오의 배는 만삭이 되었고 여전히 아이들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클레오는 아이들의 할머니와 함께 태어날 아기의 침대를 고르러 가구점으로 향한다. 거리에는 대학생들의 시위 준비로 한창이다. 분노와 열기로 가득 찬 바깥 거리와 반대로 가구점 안은 조용하고 평안하다. 그리고 총성이 울린다. 카메라는 가구점의 창문을 통해 바깥 거리를 보여준다. 수백 명의 인파들이 혼비백산 흩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거리를 보여준다. 가구점 안 또한 두려움과 공포가 휩싸이고 한 남성과 여성이 자신들을 숨겨달라면서 들어온다. 곧이어 총으로 무장한 강경진압 단원들이 들이닥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남성을 죽인다. 클레오 앞에 총으로 무장한 강경진압 단원들 중 한 명은 파르민이었다. 파르 민 또한 그녀를 알아보고 순간 자리에 얼어붙는다. 두 남녀 모두 온몸이 경직된 채 서로를 쳐다보다 파르민은 자신의 총을 거둔 채 가구점 밖을 나가고 시선에서 사라진다.

경직된 클레어의 다리 사이로 백색의 액체가 흘러내린다. 죽음이 자욱이 깔린 거리와 상점에 한 줄기 생명이 태어나려는 빛줄기 같았다. 영화는 죽음의 끝에서도 새 생명들은 계속해서 태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살아감을 느끼게 된다.

산부인과는 산모들로 가득 차 있었고 몇 시간 전의 길거리처럼 시끄럽다. 하지만 클레오는 터져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소리치지 않는다. 참고 참으며 그녀의 온 힘을 다해서 조용히 신음소리를 낸다. 영화는 클레어의 출산과정을 차분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흑백 컬러의 화면은 그 과정을 긴장감 있고 무언가 모를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단 한 번의 비명소리도 지르지 않고 클레어의 아기는 세상에 나왔지만 빛을 보지는 못했다. 스크린의 반대편, 자신의 아이만을 쳐다보는 클레어의 뒷모습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왜 눈을 떼지 못하는지, 제발 아니라고 빌고 있는 그녀의 마음이 모두 전해졌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5. 페페의 말을 빌리자면 클레오는 벙어리처럼 말수가 줄었다. 완전히 미소를 잃은 것은 아니지만 기운 넘치던 예전의 클레오는 보이지 않는 듯하였다. 자신의 배에서 태어날 생명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에서 떠나가야 함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 그 누구도 그렇지 않았을까. 아직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클레어였지만 소피아와 아이들과 함께 휴가를 떠난다. 소피아는 휴가지에서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다. 아버지는 우리들과 함께 살지 않으며 집을 떠난다고. 우리는 더더욱 힘을 합쳐서 다 같이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갑작스러운 진실에 아이들은 당황하고 슬퍼하였지만 다음날 바다를 보면서 아이들은 해맑은 미소를 띠고 파도를 향해 나아간다. 아이들의 순수함과 무모함은 어떤 고난과 파도에도 부딪히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연약하고 자라기 전까진 보호받아야 하는 생명들이다.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클레오는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는 소피와 파코에게 바다를 향하며 외친다.

또다시 자신의 눈 앞에서 생명들이 꺼져가는 것을 더 이상은 볼 수 없는 클레오는 주저 없이, 한 발자국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다로, 파도 속으로, 물속으로 걸어간다. 물이 턱에 차올라 숨쉬기 조차 힘들어지는 상황에 클레오는 아이들을 마주하고 손을 내민다. 죽음이란 것은 편한 것이 아닌 너무나도 슬프고 마주하기 힘든 것이라는 것을 클레오는 경험했었고 구원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태어나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버렸던 페르민처럼 자신도 무책임한 마음을 한 때 가졌으니까.

하지만 클레오는 변하려 했고 달라져야 함을 느꼈다. 절망 앞에서 쓰러지지 말고 무책임하게 방관해선 안 됨을. 책임을 지고 사랑이라는 강력한 힘이 자신을 살게 하는 원동력임을 알았기에. 소피아 또한 무너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생명들, 아이들이 남아있고 그들이 곧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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