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상당히 어린 시절부터 ‘난 공부를 잘해야 돼’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그저 목적 없이 왜 잘해야 되는지도 모른 채 공부를 했다.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을 다니고 성적에 신경을 썼던 기억이 있는 걸 보니 상당히 어린 시절부터였다. 물론 엄마의 입김이 있었다. 하지만 그 도의 입김은 버틸 수 있는 정도였고, 큰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결국 ‘내가 지금 노력해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구나’라는 답이 머릿속에 이미 자리 잡혔다.
주인공 준수는 수영선수다. 영화 속에서 준수의 나이는 정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수영을 시작한 지 2년밖에 안되었다는 말만 나오니, 초등학생 때 시작한 것 같다. 준수는 그저 수영이 재밌어서 시작했다. 스스로도 재능이 있는 것 같고, 물속에 내리쬐는 햇빛을 보는 것, 그것이 준수에게 가장 기쁘고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전국대회 수준에 나가서는 4등만 한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0.5초 만 손을 더 빨리 뻗었으면, 조금만 더 손톱이 길었으면 할 거리, 그 정도의 차이로 메달을 따지 못한다. 이런 준수를 보는 엄마는 애가 타고 불안해진다. 영화에서 준수를 향한 엄마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보인다. 당연히 부모라면 자식이 잘되는 것을 바라고 이는 당연하다. 준수를 위해서라면 종교도 상관없이 도움이 되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기도하러 간다. 준수의 동생과 함께 간 절에서 동생은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떤 소원을 빌었냐고. 준수에 대한 소원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동생에 대한 소원은 잠깐 당황과 고민 후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소원은 없다고 한다. 어머니로 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기 이전에 한 인격체로서 살아왔던 한 여성은 누군가의 어머니로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부터는 그들을 위해서만, 자신의 삶은 내려놓은 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모든 어머니들을 대변해주는 이 장면은 씁쓸하면서도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내 아이가 상처 받더라도 1등만 할 수 있다면, 1등으로 보상받을 수 있으면, 자신이 포기한 자신만의 삶은 보상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극단적인 그녀의 사랑은 결국 아이를 점점 망쳐가고 있었다. 1등을 위해 소개받은 코치는 과거 국가대표 수영 유망주 선수였지만, 당시 감독의 폭행으로 결국 국가대표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그만두기 전 우연히 알게 된 한 기자에게 이 사실을 기사화해달라고 했지만 이는 무시당했고, 그는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저기 어딘가로 그의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아이와 자신 모두를 상처 입히고, 어떠한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마저 묵인하게 한 잘못된 사랑이 결국 틀린 것임을 깨닫는다. 그저 물속에서 빛을 따라 수영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아이에게 다시 그 즐거움을 돌려줌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만끽하게 해 줌으로써 결국 준수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토록 원하던 1등을 해낸다. 이 영화는 현대 치열한 교육열 속에서 살고 있는 한국의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당연히 영화에서 보여주는 폭력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이에게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4등>을 통해 많은 부모님들이 자신들을 한 번 씩 돌아보고 아이들의 공부하는 등을 한 번 바라보길 바란다. 그 등에 무어이 짊어져 있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무게가 짊어져 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