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HSP의 두통
아무리 아파도 진통제는 먹기 싫어요.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아직 설 아픈가 보구만~’
~하고 핀잔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박카스 한 병에도 마치 술에 취한 양 후둥거리고 그래서 흔한 콜라마저도 조심스러운 인체의 예민함은 약에도 비슷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통인류에게 진통제는 생명수 같은 존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그래서 망설여지는 선택지일 수도 있습니다.
만성두통환자분들이 드셔봤거나 혹은 드시고 있는 약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예민한 분들께는 '약은 어디까지 드실 수 있습니까~'하고 여쭙게 됩니다.
‘애드빌(이부프로펜) 정도는 가능한데 그래도 늘 조심스러운 건 마찬가지예요,
연질캡슐은 위에서 돌돌 돌아 속이 울렁거려서 토할 때도 있구요,
나라믹은 먹으면 심장이 조여서 잠을 깨고,
타이레놀은 몸이 착 가라앉아서 더 힘듭니다...’
그나마 이부프로펜 두드러기는 없어서 다행인 분입니다.
진통제는 두통을 가라앉히려고 먹는 약입니다. 그런데...
진통제를 먹으면 두통은 덜해지는 대신 다른 곳이 아파지거나,
두통이 좀 낫나마나 가늠하기도 전에 이내 부작용이 생긴다면,
진통제를 먹고 골골하느니 차라리 오래 익숙한 두통을 견디는 편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두통이 있어도 진통제를 먹지 않는다면,
그건 그릇된 신념에 의한 거부보다는 이렇듯 먹을 수 없기 때문인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연구자가 아닌 이상 약의 부작용을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고, 소수의 부작용에 대한 정보가 잘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그러니 곤혹스러운 설명보다 숫제 입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이런 민감한 분들에 대한 진찰은 다른 분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라면도 못 먹고,
빵은 한 조각만 먹어도 머리가 아픕니다.
그런데 국수는 또 괜찮습니다.
밀가루라고 다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체의 운영체계가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화기 점막이 민감하고 간의 대사력도 취약해서, 드시게 될 탕약도 미리 이상유무를 확인할 수 있도록 복용 테스트를 거치게 됩니다. 고려할 요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예민한 분들의 경우에는 자기자신에 대해 꽤나 오랜 세월동안 면밀한 관찰을 해오고 있는 분들이 많아서, 두통유발요인에 대한 파악도 더 소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정밀한 치료설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치료과정에서도 치료단계의 전환시기를 보다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이점도 있습니다. 이렇듯 예민함은 단점일 수도 있지만 훌륭한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두통이 있어도 진통제를 못 먹는 또는 안 먹는 소수의 두통인류도 있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蛇足)
대개 이렇게 예민한 분들은 HSP(Highly Sensitive Person)에 속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중에 설명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