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는 “두 번 살기”이다. 대부분의 삶은 수많은 과오와 실수로 가득하다. 종종 쓸데없는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며,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기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건다. 언젠가 나이가 들고 한참 뒤에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곤 하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린다. 인생은 한번 뿐이기에 우리의 인생을 바로잡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만약 인생의 2회 차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전의 수많은 실패들을 교훈삼아 더 나은 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환생이나 사후세계의 영역은 인간의 권한이 아니기에 이 선택지는 불가능하다.
두 번째는 “죽음”을 상기하는 방법이다. 김영민 교수의 에세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는 매일 아침을 맞이할 때 나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스스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대로 직면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인생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죽음은 아무런 고통이 없으며 불안도 걱정도 근심도 없는 “無”이기에, 우리가 지금 이미 죽은 상태라면 이 세상의 어떤 상황도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남아있는 여생은 “덤”인 것이며, “無”의 초연함과 둔감함에서 앞으로 무엇에 집중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누구나에게 죽음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그제야 남은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게 된다.
최근 몇 년 간 운영해온 독서모임 마무리를 앞두며 “마지막”의 의미를 깨닫는다. 긴 희노애락의 시간이 담겨있는 모임의 끝에서 몇 번의 남은 일정에 대한 “소중함”을 느낀다. 그동안 힘들게 했던 멤버들, 평소라면 당황스러운 순간들조차 “연민”을 통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마치 그동안의 모든 순간들이 이 서너 번의 일정을 위해 존재했던 것 같이 마지막에서 나온 “특별함”은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삶 역시 그렇다. 영원함 속에서는 그 무엇도 진정한 가치를 지닐 수 없다. 아름다움도, 특별함도, 소중한 것들도 모두 사라진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특별해질 수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가까워지는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본다. 그러나 점차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인 명예나 성공, 관계가 모두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통스러워한다. 죽기 직전 아들 게라심의 돌봄 속에서 따뜻한 그의 손을 잡는다. 아무런 계산과 어떠한 의도가 없이, 그저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보며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그를 보며 드디어 알게 된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어떠한 장애물이 없는 사랑과 연민, 그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야 인생과 죽음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
인생은 짧기 때문에 우리는 매순간 조급하고 여유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사치라고 질타 받는다. 하지만 김영민 교수의 말처럼 오늘 죽음을 맞은 이 순간부터는 인생은 결코 짧지 않다. 죽음을 통해서 “진짜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불평한다. 자연은 인간보다 다섯 배 또는 열 배나 오래 살도록 수명을 주는데 더 많은 사명이 있는 인산에게는 왜 그토록 짧은 수명을 주었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세네카는 말한다. “인간의 수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에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다. 사실 인생은 충분히 길며, 시간을 제대로 잘 쓰기만 한다면 큰일들을 해낼 기회는 넉넉하다“고 말이다.
<신경끄기의 기술>의 저자 마크 맨슨은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기 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죽음을 앞둔 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는다”고 말한다. TV를 보고 휴대폰을 하며 게임을 하고, SNS를 빠지고 남들의 인생에 참견하고 비교하며, 돈만을 쫒고 돈을 위해서만 일하며, 매일 술을 마시고 이성과 쾌락을 즐기는 모든 형태의 “중독”이 뇌를 마비시켜 결국 남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독적인 쾌락을 “행복”이라 포장하여 죽음을 망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셈이다.
인생이 뭐든 간에, 마침내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향해 나아간다. 인생에 단 한번뿐이며, 전 세계 80억 인구가 맞이할, 40억 년 전의 최초의 생명체의 탄생으로부터 억겁의 시간동안 반복되고 그 누구도 피하지 못했던 “죽음” 말이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과 나 역시 그 종착지로 가고 있다. 인생은 “죽음”으로부터 완성된다. 그래서 인생은 무엇보다 소중하며 결코 짧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