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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길 Jan 20. 2022

사서 하는 반복 작업의 매력

온라인 게임의 법칙

 얼마 전 있었던 대화 자리에서 나온 메타버스 얘기에 문득 메타버스 체험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설치한 로블록스와 로블록스 스튜디오지만, 메타버스 생태계를 관찰한 건 몇 분 안되고, 이상한 노가다 게임만 며칠째 하고 있다. 메타버스 체험을 하려 했는데, 뭔가 잘못된 거 같다. 기존 대형 게임들에 비해 그래픽 형편없고, 콘텐츠라곤 칼을 휘두르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점수를 얻는 것 밖에 없는 이 게임이 한 때 최고 동접자수 10만을 기록했고, 여전히 로블록스 내에서 유저가 많은 게임인 점이 놀라웠다.

이걸 하고 있는 나도 레전드

 칼을 휘둘러서 뭘 잡는 기본적인 개념조차 심플하게 생략된 이 게임은 시작부터 끝까지 노가다 일색이다. 위로 점프하면서 새로운 섬을 발견하는 건 파쿠르적인 요소가 있어 초반엔 재미있지만, 게임이 진행되다 보면, 이 역시 엄청난 반복을 요구하는 탓에 반복의 일부로 편입된다.


당당히 스토리 따위는 없는 이런 게임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다.


1. 엄청난 숫자 단위

기본적으로 제한적인 콘텐츠의 틀 안에서 클리어라는 개념이 없도록 하려면, 돈이든 능력치든 숫자라도 계속 높아져야 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숫자 단위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게임에서는 무량대수를 넘어 무려 10의 111승까지 사용하고 있다. 1부터 시작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가다가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다.

 

2. 환생 시스템

캐릭터의 기본 성능을 대폭 올려주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한다. 이 게임에 준비된 총 59번의 환생은 정점에 다다라 게임이 끝날 걱정은 조용히 접어두게 해 준다. 약간의 변주는 있겠지만 같은 콘텐츠를 59번을 반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3. 노가다를 쉬워지게 하는 상품

고된 노가다에 지친 유저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갖가지 '유료' 상품들이 있다. 조금의 과금으로도 엄청 편해질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무과금 유저에게는 불속성의 길만 열려있다.


4. 확률 시스템

좋은 아이템이나 펫은 절대 정가에 주지 않는다. 절대 쉽게 얻을 수 없도록, 수백 번 수천번을 뽑아도 나올까 말까 한 극악의 확률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다. 사실상 효율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과금 유저가 되는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게임이 있다. 스토리 진행에 참여가 가능하다는 영화가 갖지 못하는 게임만의 장점 때문에, 웬만한 영화보다 감동을 주는 게임도 많이 경험했다. 플레이 내내 화려한 볼거리와 정교한 스토리 감탄하기도 한다.

영화 이상의 탄탄한 스토리를 자랑하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명작 게임들을 마다하고 왜 저런 노가다 게임에 빠질까 싶은데,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나 또한 틀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그만의 매력이 있다. 단순히 디지털 숫자를 높이기 위한 무의미한 목표만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사람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반복 작업을 좋아하는 본성이 일부 내재된 것 같다. 소위 '핵과금 유저'라 불리는 사람들은 공격력, 골드 등의 디지털 숫자를 높이려는 의지가 매우 강해서 억대에 이르는 큰돈을 게임에 소비하기도 한다.


회사에게 돈이 되는 노가다

 단순 반복 작업에서의 완전한 해방을 꿈꾸며 로봇을 만들어 모든 분야에 활용하는 한편, 잃어버린 단순 반복을 위한 설계된 프로그램을 찾아내어 돈을 주면서 즐긴다. 참 아이러니하지만, 노가다 게임이 시장에서 제일 잘 팔리고 돈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로블록스의 게임들이 기존 대형 게임들에 비해 만들기 쉽고 그래픽과 콘텐츠가 허접하지만, 노가다를 즐길 수 있을만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도록 디자인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예전의 산업화 시대에는 반복 작업을 위한 레일을 만들어 사람을 앉히고 돈을 주면, 부자가 되는 세상이었지만, 지금은 그럴듯한 레일만 만들면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 앉아서 돈을 내는 세상에 이르렀다. 메타버스 플랫폼의 등장으로 대형 게임사가 아닌 개인이더라도 비교적 쉽게 레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게임을 잘 디자인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돈 벌기 좋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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