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로 떠난 환상특급
이번 여행 이전까지 유럽은 주로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 '몽상가들'이 그려낸 예술적 자부심과 그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는 겪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해묵은 환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래된 말이긴 하지만 어릴 때 주워들은 '유럽식 복지'라는 단어도 환상의 한 부분이었다. 소득의 절반에 가까운 세금이 부담스럽긴 하겠지만, 노후에 대한 걱정이 없다던 모두가 행복한 그런 완성형의 유토피아적 복지 시스템도 유럽의 환상이라는 책의 한 챕터는 담당하고 있었다. 제로웨이스트와 관련된 유럽식 환경 정책은 성숙한 시민 사회에 따르는 부록쯤으로 여겼다.
일주일 동안 파리에서 지내면서 느낀 건, 환상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기대 중 일부는 실재했지만, 상당한 부분이 허상이었다는 것이다.
예술은 실재했다.
그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은 진짜였다. 거금을 들인 뮤지엄 패스(관광객용 박물관 프리패스)를 최대한 활용해보려고 주어진 48시간 동안 노력했지만 삐걱거리는 무릎이라는 물리적 한계에 굴복하고 말았다. 루브르 안에 전시된 것만 놓고도 그림과 조각 하나하나, 감상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 박물관 중에는 이 정도의 전시규모를 가진 곳을 보지 못했다.) 48시간 내내 열심히 박물관들을 헤매며, 정교함과 높은 벽을 가득 채운 스케일에 감탄은 하지만 예술에 조예가 없어 깊이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술품의 어마어마한 양과 그것을 스치듯이라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찾아온 사람들만으로도 프랑스 사람들의 예술을 향한 열정과 자부심을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 있는 예술품을 인구수로 나누면 아마도 압도적으로 높은 숫자가 나올 것 같다. 그 숫자로 예술 산업의 볼륨 정도는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퐁피두 미술관에선 도저히 알 수 없는 현대 미술 작품을 앞에 두고 프랑스 사람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참 대단해 보였다. 그들이 업계 종사자일 수도 작품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저녁에 뭘 먹을지에 대한 대화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또한 단편적인 모습에서 비롯된 환상의 잔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예술과 헤리티지는 돈이 된다.
샤넬이라는 브랜드가 있다. 돈이 없는 불행 중에 관심도 없어 다행인 명품 분야의 유명 브랜드다. 이번에 친구 따라 샤넬 매장을 처음 가봤는데,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른 아침부터 돈을 싸들고 모여든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 나와 친구는 느지막이 11시 반쯤 갔는데, 줄을 서고 한 시간 만에야 매장에 들어갔고, 두 시간이 더 지나서야 담당 셀러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단 두 단어만 듣고 나와야 했다.
sold out.
샤넬은 고객에게 저 두 단어를 들려주더라도 몇 시간이고 기다리게 한다. 샤넬에게는 재고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줄 수 있는 기술이 없었을까? 아니다. 기술은 이미 차고 넘치는데 일부러 기다리게 한다. 평소 콧대 높은 돈 많은 사람들을 매장 앞 광고판으로써 무료로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이 잘 나가는 가죽공방이 다른 곳에 비해 유독 재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친구에게 푸념했다.
"와~ 샤넬은 정말 재수가 없구나."
친구가 답했다.
"그래도 되니까."
그렇다. 보통의 장사는 이렇게 하면 망한다. 하지만, 헤리티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도 까다로운 취향의 고객들에게 최상의 고객 만족을 실현하며 아주 훌륭하게.
친구에게 품질의 정점을 찍는 가죽 공방을 차리면 이렇게 되는 걸까 물었는데, 한국에선 절대 안 되고 프랑스에 본점을 차려야 잘 될 것 같다고 했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서 맞장구를 쳤다. 제품의 품질을 떠나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치품의 브랜드가 유럽 태생이니까.
친구와 나는 우리의 게으름을 탓하고 내일 매장 오픈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오기를 다짐하며 각자의 길을 나섰다.